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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Aug 27. 2024

My Cinema Aphorism_12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2

CA56. 안태진, 〈올빼미〉(2022)

   몸소 왕의 자리에 앉아보면 자식을 망가뜨리는 아비의 심정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정말 이해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해도 되는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 세상에 인간이 저지르는 일 가운데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인간은 필요하다는 판단만 서면 무슨 짓이라도 상상하고 저지를 수 있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 처지가 되어보면 안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것이 왜 있겠는가. 하지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기꺼이 이해하려 든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아닐까. 이해해도 되는 일인가,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를 구분하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구분만큼 인간이 쉽게, 곧잘 잊어버리는 일도 드물다.     


CA57. 서은영, 〈동감〉(2022)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또는 그 관계의 성질이 통신 매체의 기술적 발전 과정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당연하면서도 신기한 현상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 일반,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사랑의 감정도 얼마든지 기술적으로 조작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건 반길 만한 일일까, 아니면, 슬퍼할 만한 일일까. 이 영화가 어딘가 모르게 정서적으로 텐션이 낮은 느낌이 드는 것은 2000년작 〈동감〉(김정권)의 설정, 곧 거기에 등장하는 통신 매체의 기술적 수준을 거의 그대로 옮겨온 탓이 아닐까. 아니면, 우리의 감정이 이미 통신 매체의 발전 과정에서 그 수준에 감응하기 어려울 만큼 큰 폭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CA58. 제임스 카메론, 〈아바타 : 물의 길〉(2022)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모든 생명체가 같은 유전자를 서로 나누어 가진 존재라는 이 엄연한 과학적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는 이 엄중한 과학적인 사실을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그 순간부터 우주는 살 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우주적인 진리는 ‘다르다’가 아니라 ‘같다’니까. 따라서 다른 것을 다르다는 이유로 달리 대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일 것이다. 하지만 달리 대하기를 멈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는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시리즈는 우리에게 이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     


CA59. 윤제균, 〈영웅〉(2022)

   안중근이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혹한 오판과 실패를 뼈아프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안중근은 전형적인 영웅 서사에 들어맞는 인물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이 거부감을 완전히 깨끗하게 씻겨주는 사례를 아직 못 만난 셈이다. 뮤지컬은 그 본성상 리얼리티와 물리적으로 적어도 얼마간 떨어져 있는 매체다. 또는, 떨어져 있어야 하는 매체다. 내 생각에 뮤지컬은 꿈이나 환상에 더 어울리는 매체가 아닌가 싶다. 영화보다 더더욱. 역사는 꿈이나 환상의 느낌으로 치장하기에는 그 세부 국면이 지나치게 자잘하고, 무겁고, 어둡고, 칙칙하고, 번거롭고, 자차분하다. 한마디로, 번쇄(煩瑣, 煩碎)하다. 다시 말하면 그런 요소들을 다 쳐내야 비로소 뮤지컬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뮤지컬을 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뮤지컬에 요구할 것을 영화에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CA60. 류승완, 〈밀수〉(2023)

   조인성이 영화에 밀착하지 못하고 다소 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는 연기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이미지의 문제일까. 한재림의 〈더 킹〉(2017)에서도 조인성은 이 영화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하의 〈비열한 거리〉(2006)에서도 얼마간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조인성의 아우라가 지닌 고유의 특징, 또는 특질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조인성이라는 배우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점에서 〈밀수〉는 이런 나만의 오해를 처음으로 풀어준 영화라고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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