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연, 《오십 미터》
P20.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 허연, 《오십 미터》(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78)
아마
대개는
잊고 싶은데
잊히지를 않아서
고통스러운 기억이
많지 않을까요.
하지만 시인은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라고
고백하네요.
좋은 기억은
물론이고,
나쁜 기억도
다
그립다는 것
아니겠어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시인의 마음은
저 같은 범인(凡人)은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크디크고
넓디넓은 모양입니다.
그런 시인이기에
이렇게 또
고백하는 것이겠지요.
‘세상에 떠나보내도 괜찮은 건 없었다. 세월도 사랑도.’라고요.
‘없었다’라는 말에 담긴
단호함이,
또는 간절함이
제 가슴을
쿵쿵 칩니다.
심지어 시인은
자연물을 보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강물은 상처가 많아서 아름답고’라고요.
상처투성이의
어떤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아니,
상처투성이를
아름답게 느낀다는 것,
그럴 수 있는
시인의 감성이
참
귀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시인은
우리의 존재를
숫제
이렇게까지
규정하나 봅니다.
‘우리는 기억이다’라고요.
우리 자체가 기억이니,
어찌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잊을 수 없다면,
그 기억이
그립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운 건
아름다운 것이기도 할 테니까
견딜 만하지 않겠습니까.
한데도 시인은
겸손하게 털어놓습니다.
‘나는 아직도 생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상처에 대해서 알 뿐’이라고요.
그리고
마침내 시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이제 기억이다. 천 년이 또 흐를 것이다.’라고요.
그러면서도 시인은
기어이
이렇게 말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기억은 불편한 짐이다’라고요.
그렇다면
설사
시인의 말대로
‘나는 누군가의 과거에 불과할’지라도
그것 또한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일 터이니,
역시
괜찮은 이별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이별이라면
받아들일 만하지
않겠습니까.
시인의 이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서 말입니다.
‘오늘 밤 목련이 목숨처럼 떨어져나갈 때 당신을 그리워합니다.’라는 말에요.
그렇지 않나요?
슬픔보다는
그리움이
견디기에
한결 더
낫지 않나요?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왜 시인이
‘잊다’라는 동사와
‘그립다’라는 형용사를
한 시구 안에
나란히 두었는지를요.
슬퍼하지 말고
차라리
그리워하라고,
우리에게
버거운 삶을,
버거운 기억을
견디는 방법을
가르쳐주려는
뜻이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