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07. [영화 톺아보기] 그 이름 없는 사제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 -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
#06. 루이즈 양과 백작, 그리고 그의 딸 샹딸
이제 사제는 한 젊은 여인을 이렇게 독백으로 소개합니다.
‘루이즈 양은 날마다 미사를 드린다.’
이어지는 말이 충격적입니다.
‘그녀마저 없었더라면 성당은 몹시 을씨년스러웠을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신도가 없는 종교는 아무리 멋들어진 성전을 구비하고 있다 한들 죽은 종교가 아닐까요. 오늘날 서구의 많은 교회들이 한갓 관광지나 유적지의 구실밖에 못 하고 있는 것처럼요.
이 짧은 독백으로 앙브리쿠르가 처해 있는 상황의 본질이 죄다 설명됩니다.
화면에는 한 여인이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마치 숨죽여 울먹이듯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자세라기보다는 차라리 홀로 감내하기 힘든 고민과 고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모습 한 가지입니다.
성당의 을씨년스러움, 썰렁함, 또는 허전함을 가까스로 면케 해주고 있는 그 여인마저 깊은 신심으로 경배를 하기 위해 성당에 와 있는 것은 아닌 셈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자기 얼굴에서 손을 떼자 촉촉이 젖어든 눈자위가 드러나는데, 그 눈물이 종교적인 감동이나, 가슴 깊은 회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은 누가 봐도 확연합니다.
이 루이즈 양이 영화의 첫머리에서 어떤 중년의 남자와 포옹하고 있던 바로 그 여인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장면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루이즈 양이 마을 유지인 백작네에 기식하며 그의 딸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신분임은 사제의 독백이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더불어, 영화 첫머리에서 루이즈 양이 포옹하고 있던 상대 남자가 다름 아닌 백작이라는 사실은 사제가 백작의 집을 방문하는 다음 장면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줍니다.
물론 이렇게 ‘설명’을 해놓으면 백작과 가정교사가 내연의 관계임이 금세 파악되고, 백작의 딸이 그 문제로 나름의 고민에 빠져 아버지인 백작과 가정교사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으리라는 점까지 자연스럽게 헤아려지지만, 실상 영화는 아무것도 요연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런 한 가정의 속사정을 아주 괴상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우선 앞서 나온 장면에 바로 뒤이어 성당에서 루이즈 양과 사제가 서로 만나 나누는 대화를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먼저 사제가 말합니다.
“외로우신가 보네요.”
좀 뜬금없는 말이지요?
하지만 루이즈 양은 다짜고짜 본론으로 치고 들어갑니다.
“백작 부인은 친절하세요. 하지만 그 딸인 샹딸 양은 저를 모욕하고 하인 취급하며 놀려댄답니다.”
“샹딸 양 한 사람만 가르치시나요?”
“애지중지 귀애하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죽었다지요? 이 이야기는 절대로 입 밖으로 내놓아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에요.”
이에 사제가 다짐을 둡니다.
“다음 주 목요일쯤 방문하지요.”
그리고 또다시 사제의 독백―.
‘백작을 만날 일이 신경 쓰인다. 중요한 계획이 이루어지느냐 아니냐의 여부는 대개 첫인상에 좌우되는 법이지 않은가. 청년회와 스포츠클럽에는 백작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다음은 브레송의 연출 스타일의 특징적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백작의 딸인 샹딸이 자기 집을 방문한 사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데, 이어지는 것은 사제와 백작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아니라, 용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제를 백작이 배웅하는 장면입니다.
관객은 그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어떤 분위기에서 오갔는지를 그저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문간에서 사제가 백작한테 말합니다.
“땅은 거칠기만 하고, 곳간은 텅 비었답니다.”
“잘 알지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이 대화만으로는 사제가 가정교사 루이즈 양의 문제를 백작한테 말했는지 안 했는지, 그 여부가 불확실합니다.
사제는 언제나처럼 일기 쓰기를 통하여 백작의 됨됨이에 대한 논평을 합니다.
‘모두 그가 매우 엄격한 위인이라고들 말한다. 그는 독실한 신자도 아닌 것 같다. 그런 사람이 어쩌다 나하고 금세 친해졌을까. 모르겠다.’
둘이 가까워진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그 결과는 다음 장면이 설명해 줍니다. 백작이 총으로 사냥한 토끼를 사제한테 선물로 가져온 것입니다.
하지만 마른 빵 정도만 간신히 소화해 내면서 위태롭게 지내는 사제가 토끼고기를 먹을 수 있을 턱이 없습니다.
여기서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눕니다. 본론은 역시 백작이 사제의 배웅을 받으면서 돌아가려는 순간까지 미루어집니다.
망설이던 사제가 먼저 말을 꺼냅니다.
“따님 문제로 진작에 의논을 드리려고 했는데요.”
“내 딸이요? 무슨 일로요?”
“따님이 슬픔에 빠져 있어서 걱정입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낯빛도 창백하고 어둡습니다.”
백작은 다짜고짜 부정합니다.
“샹딸이 슬픔에 빠져 있다고요? 천만에, 그럴 리가요?”
사제는 계속합니다.
“따님을 직접 위로하시기가 뭣하시다면, 루이즈 양이 나서서 따뜻한 마음으로 다독여주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마침내 백작도 안색이 바뀝니다.
“미쳤습니까?”
또 사제의 일기―.
‘루이즈 양 이야기를 꺼낸 게 그의 비위를 거스른 모양이다. 한순간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어째서?’
영화는 계속 이런 식입니다.
사제는 흡사 일기를 쓰기 위해서 살고 있지 않나, 싶은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지나고, 관련 정보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차츰차츰 이야기의 윤곽이 드러난다는 것은 역시 신기합니다. *(다음 글로 잇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