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58
CA286. 오시마 나기사, 〈소년〉(1969)
가족 자해 공갈단 이야기.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아버지. ‘결손’ 가정 출신으로 전남편과 자식을 버린 경력이 있는 새엄마. 그리고 ‘나’와 내 동생. 이 영화의 이야기가 처절한 것은 분명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탓이다. 소년은 어리지만 성숙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아무리 언어도단의 행각을 벌이고 있어도, 그것은 기이할지언정 사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라리 측은하다. 하여 관객으로서는 그들의 행각이 무사히 마무리되어 그들이 이제 더는 그런 짓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 만한 경제적 여유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기를 바라는 심정이 된다.
CA287. 스티븐 소더버그, 〈솔라리스〉(2003)
자신의 정체가 원본이 아니라 카피본임을 알게 된 자의 혼란. 어쩌면 세상은 조만간 카피본들이 판을 치는 고약한 디스토피아가 될지도 모른다. 이는 로봇이 지배하는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A.I.〉(2001, 스티븐 스필버그)―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어차피 세상에는 진짜배기 인간이 점점 희소해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정신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그러하다. 인간의 모든 장기는 대체가 가능하다. 그럴 수 있는 시대가 곧 온다, 어쩌면. 이것은 과학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있어 보이는 상상이기에 더욱 끔찍하다. 여기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1972)를 굳이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
CA288. 톰 데이, 〈쇼 타임〉(2002)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의 차이는 코미디에 어울리느냐 아니냐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캐스팅은 에디 머피의 상대역으로는 적격이다. 형사의 활약이 일종의 ‘쇼 타임’에 해당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있을 법한 이야기다. 적어도 미국에서라면. TV는 경찰이 범인을 검거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고, 미국인들은 그것을 보며 즐긴다. 미국이란 그런 ‘쇼잉’의 사회라는 지적.
CA289. 거린더 차다, 〈슈팅 라이크 베컴〉(2002)
‘Bend It Like Beckam’이 원제. ‘감아 차기’, 또는 여자로서 몸에 인도의 전통 의복을 ‘감아 입기’. 그녀는 인도 여인이지만, 동시에 영국인이기도 하고, 또 부르주아다. 그리고 축구선수다. 이미 진짜 인도인은 아니며, 물론 진짜 영국인도 아니다. 어쩌면 진짜 부르주아조차 못 되는지도 모른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1996, 스티븐 프리어즈)의 저 파키스탄인과 그녀는, 또는 그녀의 가족은 얼마나 다른가.
CA290. 우디 앨런, 〈스몰 타임 크룩스〉(2002)
이 ‘잠시 범죄자였던’ 인물의 우스꽝스러운 인생 부침기(浮沈記). 전과자 신분으로 또다시 은행을 털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궁지에 몰렸던 밑바닥 인생이 어느 날 갑자기 뜻하지 않게 아내가 쿠키 장사로 대박을 터뜨린 덕분에 전국적인 체인망을 거느린 거대 기업주로 변신하는 성공기.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성공 자체가 아니라, 그 성공의 정점에 머무는 일이다. 그들이 상류사회의 교양을 체득하고자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그들 부부 사이의 관계는 급속히 파멸로 치닫는다. 하지만 운명은 장난스러워서, 또 한 번의 엉뚱한 반전을 그들에게 허락한다. 파멸의 끝에서 그들은 다시 예전의 부부애를 회복하는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상류사회의 온갖 허위의식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하던 우디 앨런은 결국 소박한 삶의 손을 들어준 셈이라고 하면 될까. 모든 것은 한갓 일장춘몽이라는 익숙한 전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