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59
CA291. 앤드류 니콜, 〈시몬〉(2002)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여 자신만의 창작물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은 신이 되고 싶은 인간의 본능에 그대로 대응한다. 모든 개인적인 창작물들은 결국 이러한 욕망의 산물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감독이 이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해 늘 욕구불만 상태로 사는 까닭은 영화가 개인적인 창작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너무도 많은 외부의 요인들이 가차 없이 개입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요소가 바로 배우다. 이 영화는 바로 그 고약한 환부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도려내고자 하는 한 가지 힘겨운 시도에 해당한다. 물론 그런 시도의 성사는 지금 과학기술의 수준에서는 아직은 시기상조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욕망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CA292. 이재용, 〈스캔들〉(2003)
그것은 스캔들이 아니라, 게임이다. 따라서 승자와 패자가 있을 뿐이다. 결국 문제는 이 승자와 패자를 어떤 기준으로 가를 것이냐, 하는 점이다. 그뿐이다.
CA293. 마크 로마넥, 〈스토커(One Hour Photo)〉(2002)
그는 스토커가 아니다. 그는 한 가정의 파멸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처받은 영혼이다. 어린 시절에 겪은 불행한 가정사로 말미암은 정신의 외상이 그를 가정의 소중함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만든 요인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병적인 것일까. 어떤 일에 대한 집착의 강도가 그것이 병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과연 될 수 있는 것일까. 그의 그 병적인 집착의 덕분으로, 어쩌면 자칫 파괴될 뻔했던 가족과, 영원히 치유를 받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을 뻔한 한 어린 영혼이 구원받았다면, 이것을 과연 ‘스토커스러운’ 행위로 규정해도 되는 것일까.
CA294. 팀 존스 & 패트릭 길모어, 〈신밧드: 7대양의 전설〉(2003)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설사 그가 악신(惡神)이라 할지라도. 다만 인간을 시험할 뿐이다. 이런 대책 없는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연유하는 것일까.
CA295. 구도 에이이치, 〈13인의 자객〉(1963)
‘대량사(大量死)’ 영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집단 액션 시대극. 13인의 사무라이들이 한 악덕 영주를 시해하러 그를 호위하는 53인의 사무라이들과 맞대결을 펼친다. 무작정 부딪히면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어려우니, 함정을 파놓고 그들을 유인한다. 작전과 기다림과 마지막 결전의 의욕. 하지만 남는 것은 허무뿐. 무사가 무사다운 체면을 세워주려는 마지막 순간의 저 목숨을 거는 배려는 감동적인 동시에 우스꽝스럽다. 같은 감독이 만든 〈대살진(大殺陳)〉(1964)의 전작(前作). 여기서 느껴지던 절도(節度)는 〈대살진〉에 이르면 아비규환의 난장판으로 뒤바뀐다. 그야말로 차마 눈뜨고 못 볼 ‘대량사’의 꼴불견이 벌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