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57
CA281. 필 알덴 로빈슨, 〈섬 오브 올 피어스〉(2002)
핵폭탄에 대한 강박관념, 또는 공포. 그 핵을 지닌 상대방에 대한 끝없는 의심. 핵 앞에서는 아무것도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엄연한 사실. 핵이 존재하는 한 이 고약한 상황은 계속된다는 점. 원작자 톰 클랜시의 막강한 상상력도 결국은 핵의 존재에 근거한 것이다.
CA282. 이만희, 〈귀로〉(1967)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의 서울역 밤 풍경. 한국전쟁의 후일담. 베트남전의 후일담. 전쟁은 남자들이 일으키고, 남자들이 진행하고, 남자들이 마무리한다. 그 과정에서 몸의 주요한 일부 기능을 상실한 남자들은 뒤에 남은 여자를 이중으로 괴롭힌다. 전쟁 중의 괴롭힘과 전쟁 뒤의 괴롭힘. 이 괴롭힘의 목록은 공포와 걱정과 외로움과 욕구불만과 번지수를 잘못 찾은 죄의식 따위로 채워진다. 좌절과 허무와 절망과 슬픔은 그 괴롭힘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만희의 계단과 김기영의 계단. 올라가는 계단과 내려오는 계단. 올라가는 인물과 내려오는 인물. 이때 몸의 기능을 일부 잃은 남자가 위층에 거주하는가, 아래층에 거주하는가의 차이가 빚어내는 정조의 어떠함. 그러니까 올라가야 하는 남자와 내려와야 하는 남자의 차이. 남자가 하는 일이 아니라, 못 하는 일이 암시하거나 상징하는 것. 남자의 직업이 소설가인가 아닌가의 차이. 김진규가 당시 한국영화에서 맡았던 인물의 전형성. 〈하녀〉(1960, 김기영)의 김진규, 〈오발탄〉(1961, 유현목)의 김진규, 〈귀로〉(1967, 이만희)의 김진규. 현실이 소설에 미치는 영향, 또는 소설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의 상관관계.
CA283. 장선우,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
정확히 구별하자. 그 소녀는 ‘성냥팔이’가 아니라 ‘라이터팔이’다. 어쩌면 ‘불팔이’라고 해야 할지도. 따라서 우리는 처음부터 거대한 착각과 오해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CA284. 이인항, 〈성월동화(星月童話)〉(1999)
장국영은 뭘 해도 슬퍼 보인다. 실은 ‘바로 그’ 4월 1일 훨씬 전부터도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미지, 그 정서에서 장국영은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언제나 혼자 남아야 하는 신세. 고독한 뒷모습. 게다가 수염까지. 양자경의 카메오 출연은 갑자기 지나간 시절 홍콩영화에 대한 진한 향수를 속절없이 불러일으킨다.
CA285. 스티브 셰인버그, 〈세크리터리(Secretary)〉(2002)
그들이 설사 신경증 환자에 변태라 할지라도, 그녀가 그의 사랑을 얻는 방법이 폭력적이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의미는 충분하다. 사랑은 바로 그렇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얻어야 하는 것이라는 전언.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다른 모든 방법은 이미 그것을 택한 순간부터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