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은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대기실에 앉아 서가에 꽂힌 책을 뒤적였다. 별로 읽을 책이 없었다. 찾는 것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벽에 기대어 앉으니 편안했다. 사방이 하얀 벽으로 된 곳이라 생각도 멈출 것 같은 깔끔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긴 숨을 내쉬고 순서가 되길 기다렸다.
지난주부터였을까? 우울한 느낌이 자주 들더니 가슴이 무거워지며 감정이 요동쳤다. 병원에 다닌 지 5개월째였다. 3년 전 담임했던 학생의 학부모에게 아동학대 신고를 받았다. 어떻게 지냈는지, 약은 잘 맞는지 간단히 확인하면 진료는 끝이 난다. 소파에 앉아 잠깐 눈을 감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름 부르는 소리에 부스스 일어나 진료실로 들어갔다.
잘 지냈냐고 의사가 물었다. 나는 크게 신경 쓸 일은 없고 복직한 직장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약은 잘 맞는 것 같지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고 감정에 기복이 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럴 땐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나는 조퇴를 하고 집에서 쉬거나 혼자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끝날 것 같은 진료가 계속되었다. 의사는 말을 이었다.
“잘하고 계시지만 그것으로 부족한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더 얘기해보세요.”
의사의 말 덕분인지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도 제가 왜 힘든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 암도 치료 중이니 건강을 우선 챙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피곤할 때는 쉬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호흡하면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요즘 학교에서 학생들과 잘 지내다가도 가벼운 잘못을 못 참고 심하게 화를 내곤 했다. 그래도 퇴근하면 잊을 수 있었는데 집에서도 기분이 우울할 때가 많았다. 피곤하고 힘들어서 사람들도 거의 만나지 않다 보니 말할 데도 없고 외로운 느낌이었다.
그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집에서 힘들면 일을 안 하고 가족들에게 맡기지만 늘 어수선한 게 신경이 쓰여요. 그리고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고 되도록 관여하지 않고 지내니 대화도 줄어들고 거리감이 느껴지네요. 그래서 좀 슬픈 것 같아요.”
덜컹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 이제 알 것 같아요. 제가 거리를 두고 있었네요.”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의사는 내가 말을 좀 하는 게 좋겠다며 병원에 와서라도 이야기를 하라고 권했다. 눈물을 쏟고 나니 답답했던 가슴이 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병원을 나왔다. 오랜만에 저녁 약속이 있었다. 아이들 키우며 10년 넘게 희노애락을 같이한 지인들이었다. 지난달 친정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보낸 ‘토끼풀’을 위로하려고 만나는 모임이었다. 시간은 넉넉했다. 천천히 그녀가 근무하는 직장으로 차를 몰았다. 서쪽으로 붉은 해가 저물었다. 주변이 어둑해지도록 누군가를 기다려보는 게 얼마 만인지. 차 안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이 한가로웠다.
‘토끼풀’은 환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그녀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도 이야기하느라 잠시도 입을 쉴 틈이 없었다. 식당에 도착해 자리에 앉으니 ‘작은별’이 일을 마치고 달려왔다. 세종으로 이사한 그녀는 최근 보육교사로 취업해 종일 근무하고 있다. 새로 일하는 유치원 소식을 나누고 있으니 큰언니 ‘팅커벨’이 도착했다. 언니는 상담사 일을 하느라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몸이다. 그래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상담을 해주며 큰 힘이 되어주는 언니였다. 우리는 아이들이 다닌 어린이집에서 만난 인연으로 여전히 별칭을 부르며 일상을 나누고 있다.
이들에게는 딸아이 입시, 나의 고소 사건, 힘이 드는 학생 이야기까지 내어놓지 못할 게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오래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와 이별한 ‘토끼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작은별’ 큰아이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년에는 쉬겠다는 ‘팅커벨’ 언니의 휴직을 환영해주었다.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마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수다스러웠고 내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워졌다.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가족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각자 저녁을 먹고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긴 외출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족들이 고마웠다.
학생들도 그대로였고 가족들도 제자리였는데 내가 다가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외로워하고 있었다. 다가갈 때는 내 말을 들어주기를 바랐고 말을 따르지 않으면 화를 내며 멀어지고 싶었다. 내가 힘들어 멀리하면서 속으로는 나를 가까이해주기를 바랬다. 그리곤 말할 데가 없다고 우울해했다. 필요하면 내가 다가서면 되는 것을. 모두 내가 만든 거리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