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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작부인 Oct 07. 2024

장난의 지혜

장난은 우리를 게도 게도 한다. 친밀한 사람에게 장난을 치면 적절한 반응이 올 수 있지만, 친밀하지 않은 사람에게 장난을 치면 생각보다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남편은 유쾌하고 잘 웃는 사람이었다. 아재 개그 수준의 뻔한 농담이 재밌다며 장난을 쳤다. 그런 그가 좋아서 결혼했지만, 결혼하고 나서 생기는 복잡한 상황에도 그는 농담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주로 내가 버거운 집안일에 잔뜩 예민해져 있을 때 사건이 벌어졌다. 말다툼이 생기면 그는 웃으며 ‘못생겨가지고…’로 끝을 내려 했다. 나는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일과 육아, 가사를 모두 감당하는 것도 모자라 남편에게 못생겼다는 말까지 듣는다며 말꼬리가 늘어졌다. 남편의 농담은 더 이상 재밌지 않았다.


나도 다정하고 잘 웃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내가 의도한 대로 마음이 전해지지 않거나 관계가 불편해지면 가볍게 생각하지 못하고 심각해졌다. 좋은 의도로 다가선 마음이 움츠러들며 소심해지다 야속하고 서운한 감정이 되었다. 나의 다정함은 빛을 잃었다.


우리는 점점 덤덤한 사이가 되었다. 거리를 두며 부딪히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괜찮지 않은 일에도 마음을 숨기고 괜찮다고 말을 잘랐다. 남편의 장난은 점점 줄어들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려웠다. 괜찮지 않은 마음이 쌓여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랬던 우리 삶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사랑스러운 막내가 등장한 것이다. 나이가 어려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상대의 마음도 잘 살피는 아이였다. 우리는 대하기 편한 막내를 두고 서로에게는 하지 않는 표현을 아이에게 하곤 했다. 아빠에게 장난을 치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딸에게 남편은 젊을 때 내게 그랬듯 ‘못생겨가지고…’라며 약을 올렸다. 그런데 딸은 ‘아빠 닮아 못생겼지.’라고 받아치는 게 아닌가. 아빠의 말을 위트있게 받아들이니 그 말은 농담이 되었다. 하는 짓이 과해도 밉지 않다는 표현이었다.


딸은 내게 장난도 잘 쳤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볼일이 급해 서두르는데 인터폰 비밀번호를 일부러 틀리게 누르며 약을 올렸다. 엘리베이터에서도 꾸물거렸다. 현관문도 막아서며 열지 않고 뜸을 들였다. 참을 만했으니 다행이지 정말 급했다면 화를 버럭 냈을 것이다. 비실비실 웃으며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 밉지 않았다. 나를 어려워하지 않고 장난을 치는 딸이 편하고 좋았다.


나도 딸에게 장난을 쳤다. 귀찮은 요구도 당당히 하는 아이가 얄밉지만 예쁠 때 나도 모르게 ‘못생겨가지고…’라는 말이 나온다. 나는 못 넘긴 말을 딸에게 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므로 그 말은 정말 농담이다. 딸은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못생겨가지고…’라는 말에 ‘응, 엄마는 더 못생겼네’로 받아친다. 그럼 내가 다시 ‘니가 더 못생겼네’하며 누가 더 못생겼는지 대결을 한다. 끝을 내면 지는 게임. 딸은 절대 져주지 않는다.      


장난을 친다는 건 상대의 마음을 전혀 모르거나 장난을 쳐도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남편이 내 마음을 모르고 친 장난에 거리를 두었던 시간 동안 나는 많이 외로웠다. 마음의 병이 몸으로 나타나고서야 장난을 쳐도 안전한 관계가 더욱 절실해졌다. 친밀함을 회복하고 싶었고 딸에게 그랬듯 남편과도 편하게 지내며 웃으며 지내고 싶었다.


마음을 열고 남편에게 다가갔다. 그저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어깨를 두드려줬다. 서운한 마음이 들면 시간을 두고 괜찮아질 때를 기다렸다. 상대는 하던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게 좀 그렇더라‘며 가볍게 전했다. 전보다 훨씬 편안했다. 말과 표정이 부드러워지니 거리감이 줄고 친밀함이 생겼다.


편안해진 남편은 말이 많아졌다. 그러다 뜬금없이 내가 어린애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예전 같으면 부정적인 의미라고 짐작하며 말문을 닫았을 텐데 그런 말을 왜 했는지 물어보니 그냥 순진하다는 얘기란다. 오해 없이 넘기고 나서 남편이 내 부탁을 듣고도 잘 움직이지 않을 때 ‘어린애 같은 부인이 하는 부탁이라 잘 안 듣고 싶군요?’라고 써먹었다. 남편이 재밌어해서 몇 번 더 써 볼 생각이다.     


우리는 더 이상 덤덤하지 않다. 친밀감을 회복중이며 남편에게 할 표현은 남편에게 직접 한다. 건강한 한 아이와의 관계가 두 어른의 삶을 변화시켰다. 덕분에 나의 삶은 조금 넉넉해졌고 우리는 조금 더 웃고 장난도 친다.


 우리 사이가 미처 친밀해지기도 전에 힘겨워져 버린 지난날을 돌아보며 짓궂은 장난도 더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기를 소망한다. 친밀하게 지내며 넉넉하게 살다 언제고 또 다시 마음이 궁색해진다면 딸이 알려준 장난의 지혜를 꼭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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