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면 세상은 온통 단풍으로 물든다. 노란 가로수 길을 따라 걸어도 좋고 자전거 트래킹을 가도 좋은 계절이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굽이굽이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보는 이마다 눈으로 담고 가슴에 담아가도 산은 그저 그 자리에서 오고 가는 이를 반긴다. 있는 그대로 어우러져 그대로 내어주는 단풍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
고속도로를 달려 주말 텃밭에 도착했다. 텃밭 주변에는 코스모스와 메리골드가 백일홍과 어우러져 피어있다. 넓은 하늘을 배경 삼아 단풍 든 산과 꽃들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그늘막에 앉아 잠시 바쁜 숨을 고른다. 몇 번의 들숨과 날숨만으로도 숨은 편안해지고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가을 텃밭일은 바쁘지 않다. 잡초와 씨름하지 않아도 되고 거둘 때를 맞춰 땅콩, 고구마, 깨를 수확하고 나면 마늘과 양파 심기 정도만 챙기면 된다. 그날그날 필요한 대로 수확한 땅콩을 볕에 말리고, 고구마를 크기별로 골라 상자에 담는다. 말려놓은 들깨 대를 털기도 하고 마늘과 양파를 심을 두둑을 만들기도 한다.
일은 주로 남편이 하고 나는 그저 손을 조금 거든다. 매주 거두어야 하는 고추, 가지, 상추, 깻잎을 따고 나면 마음 가는 대로 일을 한다. 텃밭을 둘러보며 물을 주기도 하고 꽃밭을 살피며 씨앗을 받아 주변에 뿌리기도 한다. 그러다 잠시 일을 멈추고 커피를 한잔 마셔도 좋다. 눈앞에 보이는 산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긴다. 살살 부는 가을바람에 마음이 한결 느긋해진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며 ‘깨작부인’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남편이 하는 걸 보고 열심히 하려고 애썼는데 어설픈 수준이어서 거의 남편이 도맡아 하게 되었다. 밭 갈고 고랑 만드는 일은 물론이고 텃밭 주변에 돌담 쌓는 일도 척척 해낸다. 고되게 힘을 쓴 남편과 꿀맛 같은 점심을 먹는다. 라면에 김밥을 먹어도 좋고 시원한 맥주를 한잔해도 좋다.
아는 거 하나 없이 시작한 텃밭도 3년째 되니 종류가 제법 많아졌다. 심어놓고 거두기만 하는 감자와 고구마가 기본이지만 올해는 땅콩도 심고 들깨도 심었더니 가을 먹거리가 쏠쏠하다. 여름을 난 비트와 당귀, 가을에 익어가는 고추와 여전히 푸릇한 부추, 맛있어지는 대파, 마지막 힘을 다해 매달린 가지, 가을 상추와 깻잎까지 다 있으니 우리 텃밭은 주말이면 꼭 들러야 하는 자연마트가 된다.
거둔 작물은 이웃과 나눈다. 시골에 살려면 남의 집 살림도 알아야 한다며 담아갈 비닐 넣어둔 곳을 알려주고 냉이며 시금치를 뜯어가라 하시던 이웃 어른에게 나누며 사는 법을 배웠다. 봄철에 주신 양파를 하나도 남김없이 맛있게 먹고 수확한 고구마를 감사의 마음으로 드렸다. 전에 비해 먹을 것이 귀하지 않은 요즘에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이 옛말이 되었지만, 동네 이웃들은 밭에서 나는 귀한 것을 쓱쓱 나누어주신다.
옆집 아저씨는 수확한 약도라지를 한 줌 주시고, 뒷집 아주머니는 무와 쪽파를 한 봉지 건네신다. 상추를 잔뜩 주시기도 하고 깻잎으로 담은 장아찌를 맛보라 주시기도 한다. 담 옆으로 가지를 친 옆집의 밤나무와 대추나무는 맛난 간식이 되고 그 집의 잘 익은 모과는 우리 손에 들려와 모과차가 된다.
텃밭은 동네 이웃들이 있어 풍성하다. 농사 고수들의 훈수를 들어가며 고랑을 만들고 심을 때와 거둘 때를 정한다. 씨앗을 나누기도 하고 싹을 낸 모종을 받아 심기도 한다. 비가 오지 않아 작물이 말라가는데도 우리가 오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돌봐주신다. 풀이 무성한 곳을 제초기로 깎아주거나 꽃씨를 나눠 점점 봐줄 만한 밭이 되게 도와주신다. 우리 텃밭이 어디서도 훤히 보이는 위치기도 하지만 동네 어른들은 부부의 어설픈 삽질을 애정으로 봐주며 마음이 머물도록 살펴주신다.
텃밭을 처음 할 때는 가져간 채소들이 냉장고에 가득해도 음식을 할 줄 몰라 버리기 일쑤였다. 농작물이 아깝기도 하고 ‘이렇게 귀한 유기농 먹거리를 잘 먹을 수만 있다면 우리 집 건강은 책임질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음식이 될지 요리책을 뒤졌다.
땅콩은 바짝 말려 껍질을 까고 에어프라이어에 구우니 껍질째 먹을 수 있는 볶음 땅콩이 되었고, 물을 붓고 간장과 물엿에 조리니 달짝한 땅콩조림이 되었다. 주렁주렁 달리는 고추와 가지는 돼지고기에 고춧가루와 굴소스를 넣고 볶아 고추잡채를 만들어 꽃빵에 곁들이니 근사한 요리가 되었다. 쪽파를 살짝 데쳐 기본 간만 해도 맛있는 나물이 되고 솎은 열무는 데쳐 놓았다가 된장국을 끓일 때 넣거나 밥에 얹어 나물밥을 했다. 어렵던 도라지 생채도 새콤하게 무치고 무 생채도 도전했다. 멸치액젓만 있으면상추 겉절이도 쉽고 아들이 좋아하는 부추생채도 금방 할 수 있었다.
요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으나 정성이 많이 필요했다. 땅콩은 볕에 말리고 겉껍질을 까서 구워야 하고 도라지는 물에 불려 껍질을 까고 쪼개서 소금에 바락바락 씻어야 한다. 재료의 특성에 맞게 순서대로 볶아야 맛이 있고 생채나 겉절이는 손으로 무쳐야 골고루 간이 밴다. 마늘은 껍질을 까서 거칠게 갈아 먹어야 맛있고 밤은 손질해 냉동해 두었다가 갓 지은 밥을 풀 때 밤만 건져 먹어야 맛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 자연은 언제나 나를 있는대로 ‘괜찮다’ 말해주는 것 같다. 편히 숨 쉬게 해주고 마음에 힘을 주고 소중한 것을 나누게 하며 용기를 내게 한다. 평소에 ‘깨작거린다’ 들었다면 불쾌했을 말을 유머로 들을 수 있게 하는 텃밭의 넉넉함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곳에 진심인 남편의 땀과 열정이 고맙고 맛있는 먹거리로 우리 가족이 건강할 수 있어 더욱 감사하다.
가을은 뜨거운 여름을 물리고 찾아든다. 낮 동안 곡식이 익을 수 있게 햇살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가도 밤이 되면 그 열기를 식혀 색과 맛을 진하게 한다. 그리하여 산천은 단풍으로 물이 들고 곡식은 달게 익어간다.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아는 가을은 여름날에 머물렀던 마음을 다독이며 물러서는 용기를 내보라 한다. 나도 텃밭에서 가을을 닮으며 잘 물러서는 가을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