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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작부인 Aug 12. 2024

상흔

뜻하지 않은 일을 마주할 때가 있다. 갑작스러운 등장과 예상을 뛰어넘는 낯섦에 한동안 얼떨떨한 기분이 든다. 시간이 흘러 문제가 해결되어도 삶을 강타한 사건은 어떤 모습으로든 그 흔적을 남긴다.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기억, 몸에 새겨진 상처 같은 것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파란 하늘과 하얀 파도가 아름다웠던 겨울 바다. 그곳에서 겪은 일은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삶을 돌아보는 이정표가 되었다.

방파제 위에 사람들이 여럿 있는 것을 보고 우리도 그리로 향했다. ‘출입 금지’ 팻말이 보였지만, 문이 열려있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커다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바로 그 순간 솟구친 파도에 휩쓸려 방파제 아래로 떨어졌다. 물속에 잠겨 있다 바닷물이 빠지니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구하려 내려온 사람들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민박집에서 몸을 추스르고 대전에 도착하니 밤이 깊었다. 다음날 병원에 갔다. 의사는 제 발로 걸어온 게 신기하다며 낙상으로 척추가 심하게 골절되었다고 했다. 침대에 합판을 깔고 누워 6주간 입원하라는 진단을 받았다.


사건이 생긴 건 30년 전, 대학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가지고 첫 여행을 떠났다. 친구와 둘이 대전에서 출발해 강원도 오대산에서 1박 하고 속초 낙산사에 들러 바다를 볼 계획이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코펠을 들었다. 강릉에서 진부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오대산에 도착했다. 눈 덮인 전나무길을 걸었다. 월정사에서 석조보살좌상의 미소를 보았다. 다음날 속초 낙산사로 향했다. 민박에서 하루를 묵고 바다를 보러 나섰다. 산뜻하게 추운 겨울 아침, 유난히 맑은 하늘이 아름다웠다. 여기서 아무 일 없이 여행이 끝났더라면 그 바다는 기억에서 잊혔을지도 모른다.

2학년 개학을 앞두고 떠난 여행이었다. 대학 1년을 보내고 이제 선배가 된다는 기대에 들떠 있던 때였다. 병상에 누워 보낸 3월은 너무나 길었다. 4주를 꼬박 채우고 어깨부터 허리까지 고정하는 보조기를 차고 학교에 갔다. 선배로서의 멋짐도 대학생의 풋풋함도 내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측은해지지 않으려고 명랑하게 굴었다. 그런 모습으로 두어 달 학교에 다녔다. 오랫동안 선배들에게 허리 부러진 아이라는 농을 들었다.


지금도 나는 척추가 골절된 상태로 살고 있다. 허리가 아플 때마다 그날을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껏 나를 버텨준 나의 몸을 더 잘 살핀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그곳은 너울성 파도가 자주 발생하는 곳으로 사망 사고가 일어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나도 그날 자칫 잘못되었다면 하반신 불구가 되었거나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위험한 사고에도 더 크게 다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감사한다.

앞으로 또 예기치 않은 일이 나의 일상을 흔들 수 있다. 또 얼마간 얼떨떨하고 당황스럽겠지만 비 온 후 땅이 굳듯 감사한 마음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언젠가 만날 수도 있는 나의 상처들이 아픔이 아닌 삶의 의미가 되어 용기를 더해준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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