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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작부인 Aug 19. 2024

멈추어 쉼

변할 것 같지 않던 삶에 균열이 생긴 건 몸 어딘가에 자라난 암세포 때문이었다. 아이 셋은 모두 10대가 되었고, 직장에서는 마지막 남은 승진길에 두 발을 들였을 때였다. 조직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던 날, ‘악성 종양이 맞다.’라는 의사의 말에 온 세상이 멈춘 듯 눈앞이 캄캄했다. 마치 하늘로 던진 공이 끝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멈춘 듯 허공에 있는 느낌이었다.      


서둘러 일을 정리하고 병가에 들어갔다. 수술과 치료를 앞두고 있어 몸을 쉬어야 했다. 온갖 걱정거리들이 먼지처럼 일어났지만, 금세 힘을 잃고 가라앉았다. 직장은 내가 없어도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갔고 가족들은 내 손이 덜 닿아도 그럭저럭 지냈다.

이제는 그동안 해오던 일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무너진 건강 앞에 일 욕심을 내려놓는  당연했다. 가족들에게 왜 나만 바쁘냐고, 왜 내가 다 해야 하냐고 불만스러워하지 않아도 됐다. 다른 사람들도 내게 모두 다 내려놓고 건장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하라 했다.


수술 일정을 기다리며 남편 손을 잡고 갑천 길을 걸었다, 가을이 된 천변에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졌고 길 위로 노란 물결이 춤을 추었다. 밤이 되면 도시의 야경이 반짝였다. 길을 걸으며 푸른 하늘과 넓은 하천의 시원한 풍경을 매일 가슴에 담으니 좁아진 마음에 숨이 좀 도는 것 같았다.

암세포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 항암치료는 받지 않아도 됐다. 스무 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겨우내 병원에 다녔다.

   

추위가 조금 누그러진 주말, 대전 둘레길을 걸었다. 사그락거리는 발소리, 뺨을 스치는 바람, 아무도 없는 산 중의 고요함은 무거운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오롯이 숨소리에만 집중하며 걸었고 아무 걸림 없이 시간을 누렸다. 햇살 좋은 바위에 앉아 소박한 도시락을 먹었다. 산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고 또 걸어 집으로 향했다.

주말마다 산에 오르며 고요함을 만났다. 그러나 세상이 조용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에서는 TV를 켜거나 대화를 멈추지 않았고, 밖에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라디오나 유튜브를 켜고 살았다. 홀로 걷는 시간은 자주 지루해져서 이어폰을 꽂지 않으면 불안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만 걸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속이 시끄러웠다.     


봄이 되어 매일 산을 오르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풍경을 만났다. 비가 오고 난 다음 날은 더욱 좋았다. 싱그러운 나무들이 말을 거는 것 같았고 촉촉하고 보송한 흙을 밟으면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습기를 머금은 향긋한 흙내음에 숨쉬기가 한결 편안했고 마음이 살살 부드러워져서 조금 더 산에 머물 수 있었다.

철마다 피고 지는 꽃을 만나는 것도 위로가 되었고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산등성이에 비추는 따스한 햇볕은 선물같이 반가웠다. 천천히 걷다가 평평한 길을 만나면 통통 뛰어도 보고 힘들면 벤치에 누워 숨을 고르기도 했다. 매일 산을 오르는 것 말고 정한 것이 없는 일상이었다. 그렇게 산을 오르다 문득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면서 정신없이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멈추어 숨 쉴 수 있을 때 삶이 무거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흘렀다. 1년 반의 휴식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니 몸은 단단해지고 마음은 좀 편안해진 내가 속삭인다.

“쉬고 싶을 땐 쉬어.”

휴식. 멈추어 쉬는 것이 삶에 집중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내 역할을 잘해야만 삶이 의미 있다고 믿었었다. 쉰다면서도 늘 다른 생각과 걱정을 하느라 편히 쉬지 못하고 살았었다.

떨어지는 공은 점점 가속도가 붙는다. 멈추었으므로 내려오는 길은 순조롭다. 숨을 고르고 쉬기를 허락한다. 식사를 간단히 하는 대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기를 선택한다. 집 근처 쇼핑몰의 근사한 정원으로 향해 경쾌한 음악을 들으며 노란 벤치에 앉아 해지는 노을을 바라본다. 좋아하는 숲길에 불이 들어올 때를 기다려 더 아름다워진 풍경을 감상하며 나무가 주는 건강한 기운을 받는다.


어떤 이유에도 물러서지 않고 나를 위해 쉼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지금껏 모르고 살았다. 잔뜩 긴장하느라 힘 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언제든 잠시 머물러 호흡에 집중하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에 집중했다가도 반드시 멈추어 쉬어야 다시 집중할 수 있다.

삶의 균열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어느 순간에도 내가 힘들지 않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조금 더 자유롭고 편안해졌다. 다시 멈추어도 언제든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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