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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Sep 04. 2022

우리의 등이 평평한 이유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는 사람과 끊임없이 돈을 쓸어모으려는 사람의 합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서울. 덕분에 서울에는 별의별 형태의 집이 다 있다. 취업 준비생 시절 내가 묵었던 셰어하우스의 방 한 칸 또한 서울의 그 어떤 자취방과 견주어 보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개성 있는 형태였다. 물론 흠도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 방은 수저통처럼 한쪽 벽만 상대적으로 길게 뻗어있었는데, 이유인즉슨 베란다로 만들어진 곳을 나중에야 실내용 방으로 개조한 탓이었다. 방문은 옷깃만 살짝 스쳐도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마치 하늘에서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듯 문이 문틀에 내리꽂혔달까. 바닥이 기울었는지, 거실과 방의 기압 차이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쾅쾅 소리는 베란다였던 방의 태생적 허술함을 시도 때도 없이 고발하는 듯했다. 룸메이트들에게 소음 공해를 끼치게 된 점은 미안했지만 정작 방 주인인 나는 그 소리가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비슷한 크기의 자취방에 비해 0 하나가 적은 보증금과 시세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월세를 생각하면 모든 걸 눈 감을 수 있었다. 아, 귀를 닫을 수 있었다고 해야 하나?

종일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밤늦게 기어들어 와 잠만 자면 그만이었던 베란다방은 집이라기보다 숙소라는 호칭이 더 어울렸다. 훌쩍 떠났다가도 언제든 돌아오고 싶은 곳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그 방에선 편히 잠든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좁은 방에 것보다 비좁은 수저통 같은 침대에 눕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작달막한 숟가락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손한 자세로 아무리 기다려봐도 잠은 찾아오지 않았다. 끝과 시작이 영원히 맞물리는 초침보다 더 초조한 내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거의 매일 밤을 감은 눈으로 지새웠다. 시야에 암막 커튼만 쳤다 뿐이지 정신은 깨어있었다. 고요와 어둠은 나의 불안을 더 선명하게 밝혀주었고 점점 커지는 내 박동 소리는 어느새 전보가 되어 “어서 여길 벗어나. 온 힘을 다해.”라는 메시지를 내 맘속 깊이 아로새겼다. 전보를 받아든 나는 아침이 되자마자 헐레벌떡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서관을 향했다. 얼른 취업해서 그 방을 탈출하고 싶었다.


밤마다 가슴을 죄어오는 불안이 어둠과 함께 물러가지 않고 해가 뻔히 떠있는 대낮까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도서관 책상에 앉아있는데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이 너무 커 건너편 학생에게까지 전달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잠을 자야 했다. 하루만이라도 아무 걱정없이 푹 자고 싶었다. 당장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고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가 숨을 곳조차 없던 나는 곰곰이 궁리했다. 그러다 그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를 몰래 내 방에 들여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룸메이트들의 생활패턴을 꿰고 있던 터라 남자친구를 셰어하우스에 잠입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때늦은 밤, 헐거운 베란다 방의 문을 꼭 잠그고 남자친구와 나는 수저통 같은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20대 청춘남녀가 서로의 몸을 꼭 맞대고 한 일이라곤 서로의 품에 안은 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것뿐이었다. 토닥토닥 토닥토닥 토닥토닥. 불안한 박동 소리를 덮을 만큼 크게, 하지만 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그 토닥이는 소리에 의지해 깜깜한 잠길을 걸었다. 그 소리를 따라가면 발을 헛디딜 일도 없고 길을 잃을 것 같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목적지가 없으니 길을 잃는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 토닥거리는 두드림은 어느새 몸통으로 들어와 더 크고 잔잔한 울림이 되었고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 피보다 따뜻한 기운을 퍼트려주었다. 나는 무얼해야 하는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꿈도 꾸지 않고 편안하게 잠만 잤다. 심장의 대척점 되는 위치, 그러니까 등 한 가운데에는 버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몇 차례 두드리면 마법처럼 불안을 꺼주는 버튼. 그 버튼이 하필 자기 손으로는 아무리 애써도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안을 멈추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남에게 등을 믿고 맡길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나는 애초에 나 홀로 살 수 없게 설계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웬걸, 나의 가장 불완전한 부분을 찾아내고 나서야 나는 내가 비로소 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건 아주 기분 좋은 발견이었다.

그때의 난 어떻게 알았을까? 불안에 잠식된 베란다 방에서 단잠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비단 이불도 깃털 베개도 아닌 따뜻한 누군가의 품속이라는 사실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거든 내 한 몸 뉠 곳은 없어도 마음속 누울 자리는 필요하다는 걸 의식 저편에선 진작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사람은 사람에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란 걸 알면서도 부정해왔다. 사람만큼 불안한 존재는 없으니까. 불안한 땅에 뿌리 내리고 싶어 하는 씨앗은 없으니까. 차라리 혼자가 되자. 홀로 완벽한 운영체제가 되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기대기 딱 좋게 생긴 등 덕분에 그 헛된 환상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토닥토닥 그 환상에 균열을 일으키던 손짓은 어느새 환상이 무너진 자리의 먼지까지 부드럽게 털어내주었다. 벼랑 끝에서 떨어져도 그 아래 구름같이 폭신한 것이 나를 받쳐줄 거라는 단단한 믿음. 그 믿음이 내겐 사랑이다. 불안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땐 생각한다. 등이 평평한 이유를.


잠 못 드는 밤, 내 등을 토닥여주던 그 친구와 연인으로서 연은 비록 끝이 났지만, 그와 함께 나눈 시간을 통해 익힌 사랑은 여전히 내 몸 곳곳에 남아있다. 자전거 타는 법은 한번 익혀두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몸이 알아서 기억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동안에 사람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웠고 그 배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의지는 의존과는 다르다. 기대고 있던 대상이 홀연히 사라졌을 때 의존하던 사람은 휘청거릴지 몰라도 의지하던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의지하는 것이란 결국 나를 응원해주는 상대방 마음속에 있는 나를 믿는 행위니까.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한 눈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행위니까. 건강하게 잘 의지했던 경험은 나를 무너트리기는커녕 나를 곧게 일으켜 세운다. 어느 순간 누가 누구에게 기대어 쉬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는 관계가 되어있다.


부지런히 노동하고 성실하게 돈을 모아 튼튼한 집을 마련하는 일만큼 내 마음속에 터를 짓는 일도 중요하다. 세상에는 걸어 다니는 폐허들이 너무 많다. 번듯한 집을 두고도 갈 곳 잃은 발걸음들로 분주하다. 무엇에 위로받아야 하는지 어디에 기대 쉬어야 하는지 제때 고민하지 못하고 제때 터를 짓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나는 주머니는 가난한 채로 맘속으로는 아주 사치스러운 꿈을 꾸는 중이다. 그건 바로 평생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고 싶다는 소망이다. ‘나 홀로 우뚝’ 말고 ‘우리 함께 끈끈히’ 살아가고 싶다. 우리 안에 포함할 수 있는 대상은 다양하다. 사랑하는 우리 설쌤, 나와 똑 닮은 우리 언니, 싸우고 토라져도 다시 또 붙어있는 우리 친구들. 누군가에겐 반려동물이, 누군가에겐 덕질의 대상이 우리의 일원일 것이다. 남이 보기엔 불안해 보이는 각각의 것들이 그 부족한 틈 사이로 서로 비집고 들어와 뭉칠 때 단단하고 끈끈하고 미련 가득해지는 우리가 좋다. 삶을 끌어안은 두 팔 한가득 힘이 실린다. 그리고 종종 잊지 말라고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내가 네 곁에 있다고.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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