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진상할 생일선물을 들고 올 테니 벌쓰데이보이가 밥을 쏘라는 딸들의 말에 나가서저녁을 먹고 들어왔다.
그래도 내가 생일 미역국은 끓여줘야겠다 싶어 다음날소고기미역국을 만들었다.
미역국 한 냄비로 끝낸 남편의 생일에 느닷없이K가 떠올랐다.
벌써 17,8년 전이다. K는 이웃이었다. 한 층에 열두 가구가 줄지어 있는 아파트였는데 나와 그는 각각 7호와 8호였다.
K는 나보다 서너 살 어렸고 남편은 나와 동갑 그리고 우리 애들보다 어린 딸 하나가 있었다. 부부가 다 전남 어디가 고향이고 서울로 직장을 다니게 되어 이사 왔다고 했다.
K는 손이 크고 살림을 잘했다. 언제 찾아가도 말끔히 정돈된 집에서 늘 부지런히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넉넉하게 음식을 해서 나눠주곤 했는데 맛도 좋고 그 지역의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 세 식구 살림에 왜 매번 음식을 많이 하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해서 이웃이나 그가 나가는 교회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한여름 폭염이 한창이던 어느 날 K가 남편의 생일이라 요리를 했다며 전을 한 접시 가져왔다.
전이라니, 이것은 명절 차례상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남편 생일에 전을 부친다는 일이 나에겐 생경했다.
하루종일 K는 무더위 속에 품이 많이 드는 잔치 음식들을 하고 있었는데 내 눈에는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옆집에 살지만 한두 번 지나치며 본 그의 남편을 떠올리며, 나는 나보다 훨씬 어린 그가 혹시 모종의가부장적억압 같은 것을 감내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나는 기회가 되면 K와 '이 문제'에 대해서 솔직한 이야기를 해 봐야지 했다.
그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어느 날 K가 그의 집에 좀 와보라고 했다.
집에 가니 큰 상자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붉그죽죽 한 과일을 보여주며 먹을 만큼 가져가라고 했다. 귀한 무화과였다. 그의 고향에서는 길거리에서 파는 흔한 과일이라지만 그 무렵 우리 동네에서는 지금처럼 무화과를 팔지 않았고 어디서 팔고 있더라도 낯선 과일이라 사 본 적이 없었다.
그날 난생처음 무화과를 먹었는데 적당히 달콤하고 폭닥하면서 혀 끝에 흙맛이 났다. 나는 무화과에 반했다.
무화과를 먹으면서 나는 K가 왜 남편의 생일날 그렇게 많은 음식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K의 이야기
언니, 우리 신랑 알지?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와서 언니는 모르나?
우리 신랑이 열한 살 땐가, 엄마가 오래 앓다가 돌아가셨대. 나는 시어머니 얼굴도 모르지.
우리 신랑이 막내아들이거든. 큰 아주버님하고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어머니가 맨날 나 죽으면 우리 막내 불쌍해서 어쩌냐고 우셨대.
생각해 봐. 열 살 먹은 아들을 두고 죽는 심정, 짐작이 가잖아.
아무튼 고등학생 때부터 큰 형네 집에서 학교를 다녔대. 형수님과 어린 조카들이 있었는데 그냥빨리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독립하자 하고 데면데면 살았대.
그래, 지금 우리 큰 형님이야. 형님도 착한 사람이야, 시동생 데리고 살기가 편했겠어? 다들 그렇게 생각해.
근데 형님이(지금 우리 형님이 우리 이모 뻘이야), 형님이 밥상에 계란후라이를 해서 놓는데 세 개씩 부쳐 놓는대. 사람은 다섯인데 항상 세 개만 부친대.
형이랑 자기 애들 둘 이렇게 세 개.
아냐, 진짜야, 우리 신랑이 그랬어. 자기는 그 계란후라이가 너무너무 먹고 싶었대. 근데 '형수님, 나도 계란후라이 주세요'라고 말을 못 했대. 형님이 자기랑 시동생을 빼고 세 사람에게 계란후라이를 하나씩 나눠주는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대.
형? 형은 뭐, 막내가 비려서 계란을 싫어하는 줄 알았으려나?
언니, 우리 신랑은 아침저녁 밥 먹을 때 계란후라이를 세 개씩 먹어. 웃기지? 진짜 매일 먹어. 그럼 하루에 여섯 개잖아? 계란 한 판 사면 일주일도 안 돼서 혼자 다 먹어.
부치는 내가 다 지겨워 죽겠어. 근데 자기는 너무너무 맛있대. 아직도 계란후라이가 좋다는데 어째.
우리 신랑은 누가 생일을 챙겨준 기억이 없대. 그찮아, 무뚝뚝한 그 형이 챙기겠어? 챙기려면 형님이 챙겨줬겠지.
그래서 내가 울 신랑 생일에 좋아하는 거 다 해 준다! 덥고 힘들게 뭐 이런 걸 하냐고 말은 하면서 엄청 좋아해.
아예 회사 사람들도 부르고 친구들도 부르라고 하면 그건 안 한대.
언니, 나는 덥고 힘들어도 우리 신랑 생일에 전 부치고 잡채 무치고 이러는 거 좋아.
그냥 불쌍해. 쇠도 씹어 먹는다는 나이에 계란후라이도 못 얻어먹고 학교 다니고. 그래서 그렇게 키도 다 못 컸나 싶고.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 불쌍해.
그래, 내가 평소에도 잘해 먹이긴 하지만 생일날은 그래도 생일이니까, 평생 못 해봤다는 생일이니까 더 해주고 싶어.
그래봐야 아직 십 년도 안 챙겨줬는데 뭐.
나는 내 맘대로 K의 처지를 무례하게 짐작한 것이 부끄러웠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형네 집에 얹혀살며 계란후라이도 맘대로 못 먹고 학교를 다녔다는 얘기는 K 남편의 사적인 기억이고 우리 시대에 있던 일이 아닌 것 같이 비현실적이었지만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 것은 맞다.
얼마 후에 K네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한 후 한 번 우리 집에 왔었다.
그 후 우리도 이사를 했다. 또 얼마 후에 K가 그 무렵에도 열심히 다니던 교회에서 전도를 하러 여기저기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K는 천상 살림 잘하고 착한 여자였다. 먹고싶던 계란후라이를못 먹고 자란남편에게 매일 여섯 개의 계란을 부쳐주는 여자였다. 생일을 챙겨 본 적이 없다는 남편을 위해 무더운 여름 방학 중간에 있는 생일마다 하루종일 음식을 하고 나눠주던 여자였다.
내 남편의 생일날 갑자기 K 생각이 났다. 그때 대여섯 살이던 딸아이도 이제 스무 살이 넘었을 텐데 K는 아직 남편의 생일에 전을 부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