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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Mar 22. 2024

신혼의 밥상 일기

레시피 엽서와 집밥 선생

 내가 신혼 주부였던 90년대 후반에는 주로 요리책이나 잡지에 나오는 레시피를 보고 음식을 만들었다. 나도 요리잡지를 정기구독했는데 창간기념 선물로 드립형 커피메이커를 받아 십 년이상 썼다.  

 잡지 뒤쪽에는 엽서 모양으로 이 달의 레시피가 몇 장씩 딸려 있었다. 앞에는 요리 사진이 있고 뒤에는 상세한 요리법이 적혀 있었다. 맘에 드는 카드는 잘라서 냉장고붙여 놓기도 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노트에 레시피를 색연필과 스티커로 정리해서 소중하게 간직했다.

 지금도 화보가 예쁜 요리책이 나오고 그걸 사서 보는 사람들있지만 그때 요리책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였다. (더 옛날 주부들은 신혼살림에 요리백과가 있었다고...)

 그때도 바일 인터넷의 할아버지 뻘 되는 pc통신이 있었지만 지금의 휴대폰처럼 게 아무 때 아무 데서나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는 아니었다.


 초보 주부가 둘이 먹을 저녁을 준비하려면 서너 시간은 걸렸다. 하긴 당근 반 개를 채 썬다 치면 또각또각또각 사이즈를 비교해 면서 써느라 20분은 걸렸을 테니까.

 거의 매일 엄마에게 전화해서 물어봤었다. 오징어 껍질이 왜 안 벗겨져? 대파는 어디 부분까지 쓰는 거야?

     

 그때 내가 오후 두 시부터 주방에 서서 조물락 만든 찌개며 국과 반찬들의 맛은 어땠을까?

 제법 매일 아침저녁을 차려 냈다는 신기하다. 지금처럼 좋고 다양한 밀키트가 있길 하나, 배달음식이 흔하기를 하나.   

 맛과 모양은 자신 없지만 그저 둘이 같이 먹는 게 좋고 하루 동안의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던 신혼의 밥상이었을 것이다.


AI이미지-VREW



 

 결혼하고 얼마 안 돼서다. 찌개를 끓여서 상을 차린 날인데 남편이 소주를 한 병 꺼내와 같이 먹었다. 결혼식 후에 주류와 음료수가 많이 남았다고 우리 집에도 한 박스씩 실어와서 발코니에 두고 있었다. 신혼 집들이도 하고 필요할 거라고들 했다. 

 나는 술을 거의 안 마시던 사람이라 우리 집으로 보내지는 소주 박스를 보면서 '대체 저 많은 걸 누가 먹으라고?'라 생각했었다.

 

 저녁밥을 먹으며 술을 먹는 남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연애시절 맥주를 마시러 적도 지만 나에게 밥과 술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아버지든 누구든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일까, 술을 밖에서 사 먹는 것이 아닌 에서 밥을 먹으면서 같이 마시는 모습 매우 이상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했다.

 - 엄마, OO이가 저녁밥을 먹으면서 소주를 마셔. 저러다 알코올중독 되면 어쩌지?


 엄마는 내 말에 엄청 웃더니 "퇴근하고 오면 소주도 한 병씩 먹고 싶어 지지. 찌개를 얼큰하게 끓이고 그런 날은 소주도 같이 내놓고 그래"라고 했다.

 밖에서 먹고 오는 것도 아니고 집에 와서 먹으니 얼마나 이쁘냐, 그랬다.


 결혼 20년 후, 우리는 남편이 퇴근길에 사서 백팩에 담아 오는 소주와 맥주로 (반찬이 뭐든지 간에) 저녁을 먹으며 한두 잔 하는 게 재미인 중년 커플이 되어버렸다.


        


  

 요즘은 요리를 할 때 레시피 엽서가 아닌 유튜브를 본다.

 26년간 도돌이표로 소환했던 음식 말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려고 유튜브를 찾아보기도 하고, 26년간 수백 번도 더 만든 찌개라고 해도 뭔가 새로운 셰프의 킥이 있나 싶어 보기도 한다.

 또 밥 하기 싫을 때도 본다. 내가 아는 대로 주도적으로 하자면 더 하기 싫고 화면 안에서 능청스러운 집밥 선생이 시키는 대로 따르다 보면 뚝딱 완성이 된다.

 그러면 작은딸에게서 가끔, 이거 엄마가 한 거 맞아? 하는 말을 듣는다.

 레시피도 과학이 맞다.


 그래봤자 하루에 한 번 밥상을 차리면서도 진짜로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그럴 때는 밖에서 남편을 만나서 먹고 들어오거나 가져와서 바로 먹을 것을 사 오기도 한다.

 그렇게 정말 주방에 있기 싫거나 몸이 안 좋은 날 말고는 소소한 반찬을 한두 개씩은 만들어 먹으려 노력한다. 신혼 때부터 내가 뭘 만들어 주든 아뭇소리 않고 잘 먹고, 소맥 안주 삼아 그릇을 싹싹 비워주는 남편이라 다행이다.        

 

 가끔 우리 딸들이 음식을 맛있게 만들면 나는 아무 의도 없이 '이제 시집가도 되겠다'라고 말할 뻔하고 얼른 입을 다문다.   

 아침밥 얻어먹으려고 결혼하거나 남편 밥 해주려고 결혼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말은 안 쓰는 게 맞다.   

 

 반드시 아내가 또각또각 채소를 자르고 만든 음식으로만 신혼의 밥상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 딸이 퇴근하고 오기를 기다려 따뜻한 요리를 해서 함께 저녁밥을 먹는 사위도 좋다.

 그러면 사위와 함께 최신 살림 정보를 주고받으며 사는 것도 꽤 재미나겠다.   


AI이미지- V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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