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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는 나의 힘

'을'이 아닌 '임차인'이 되기

by 이명선

부동산 임대차 계약서에는 갑과 을이라는 단어 대신 임대인과 임차인을 사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임대인과 임차인의 상호 관계를 통상 권력의 크기가 다른 갑을 관계 여긴다.

'임차 당시 시설물 상태로 원상복구 해야 한다'는 조항이나 '애완동물을 기르거나 흡연을 하지 않는다'는 특약 사항 등 임대인보다 임차인이 지켜야 할 것들이 더 많다.

빌려 사는 남의 집엔 못 하나도 맘대로 박지 못한다(사실 그렇지는 않지만)는 굳은 인식도 있고 집 없는 설움이란 관용어도 있으니 임차인 이름 옆에 서명하면서 소심해질 만도 하다.

그런데 뭐 인간사에 설움의 종류가 한두 가지인가.

못 배운 설움, 돈 없는 설움, 나이 든 설움, 키 작은 설움, 아들 없는 설움, 딸 없는 설움, 장남 장녀의 설움, 그에 못지않은 막내의 설움.......


임차인은 공짜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임대인이 원하는 이용료를 정당하게 지불하는 소비자이다.

전세 임차인에게는 거의 집값에 육박하는 전세가가, 월세 임차인에게는 다달이 내는 월세가 이다.





작은애네 임대인은 20년 전 작은 오피스텔을 분양받고 쭉 월세 수익을 얻는 개인이다. 계약서를 쓸 때 한번 만났는데 임대차 계약에 관련한 것뿐 아니라 집 관리 일절을 부동산 중개업소에 맡기고 거의 돌아보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돌아봤던 월세 오피스텔들이 거의 그랬다. 임대인은 세입자가 바뀔 때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러 오고, 중개사가 집을 보고 도배를 해야 한다고 판단하거나 건물에 무슨 이슈가 있다고 알리고 해결하는 분위기였다.

내가 돌아봤던 월세 오피스텔들이 거의 그랬다. 임대인은 세입자가 바뀔 때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러 오고, 중개사가 집을 보고 도배를 해야 한다고 판단하거나 건물에 무슨 이슈가 있다고 알리고 해결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를 만났을 때 본인이 직접, 여기(중개업소)에 몇 년 만에 왔는지 모르겠다고, 다 알아서 잘해 주신다고 말했다.

전 세입자가 5년간 자동연장을 하며 살았다더니 전 세입자의 첫 계약 때 와 보고 이번 새 계약에 온 것인가 보다. 그날도 엘리베이터만 타면 가 볼 수 있는 자기 집에는 가 보지도 않고 우리보다 먼저 돌아갔다.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 때도 주인에게 직접 연락한 것이 아니라 부동산 중개인과 소통했다. 주인과 중개사의 오랜 관계가 그런데, 내가 갑자기 주인에게 다이렉트로 연락을 한다면 뭔가 '과장님을 안 통하고 부장님한테 바로 일러바치는 눈치 없는 직원' 같이 느껴졌다.

오로지 우리 딸을 위해 다른 건 생각 말고 일단 그 집의 냄새부터 빼자고 정신없이 이틀을 보내고 난 사흘째 아침이었다. 잔금을 다 내고도 여전히 아이를 재울 수 없는 그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아무래도 세입자의 권리를 주장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벽에만 한 도배도 천장까지 추가로 해달라 하고, 습기에 불어 갈라진 욕실 문도 고쳐달라고 해야겠다. 근데 만약 그건 중대한 하자가 아니고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크기가 다른 문제라서 못 해 준다면 어쩌지? 그럼 뭐 비용을 반 부담하겠다고 흥정을 해야 되겠다.

사람 간의 일인데 그래도 너무 이기적으로는 하지 말자 싶어져서 '너는 헛똑똑이!'라고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는 속담이 있다.

작은애의 집에 들어간 순간 나는 어이없는 장면에 웃음이 났다.

밤사이 다른 문제가 생겼다. 올해 초에 바꿨다는 벽걸이 에어컨 아래로 물이 새서 벽면과 새 도배지가 젖어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에어컨 누수를 잡고 다시 도배를 해야 하니 천장 도배를 요구하기가 수월하겠다. 게다가 에어컨 아래에는 일반적인 누수의 현장과는 달리 낯선 고동색의 물이 한 줄기 흘러 있었다.

에어컨에도 실내 흡연의 흔적이 남다


올해 오피스텔 전체가 다 같이 에어컨 교체를 했고 실외기 연결이나 배수 호스도 몇 집씩 묶어서 돼 있다고 한다. 오피스텔 관리단에서 보러 왔다. 기사님은 에어컨 설치 잘못으로 인한 누수가 맞다면서 처치를 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꾸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이 갈색 물은 어디서 온 건지 모르겠단다. 에어컨 누수는 맑은 물이지 이런 색깔의 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벽지를 뜯고 한참 뒤지던 기사님은 조심스럽게 나를 돌아보고 물었다.


-혹시, 방 안에서 담배 피우세요?


실내의 뜨거운 공기와 습기는 에어컨 안의 증발기 장치로 들어가서 맺히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 에어컨을 켠 채 담배를 (많이) 피우면 니코틴이 흡착되고 때마침 에어컨 누수 사고가 생겨서 저렇게 갈색물로 흘러나왔다는 설명이었다.


이제 남 탓은 그만하자며 애써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일어났다.


이 집 아니고, 담배 피운 집의 흔적.. 유튜브 채널 중




알고 보면 헛똑똑이인 내가 굳이 용기를 안 내도 되도록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중개사는 흡연을 한 집인지 몰랐다며 사과했다. 그런 줄 알았다면 이번에 도배를 싹 다 했을 거라면서 빼놓은 천장 도배를 새로 해 주었다. 도배값은 전 세입자가 보상하게 할 거란다.

그리고 물이 샌 에어컨은 오피스텔 측에서 보수하고 손상된 벽까지 깨끗하게 도배를 해 주었다.

작은애는 잔금을 치른 지 6일 만에 비로소 제 집에서 잘 수 있었다.

입주까지 별 일도 많았지만 일단은 자취 라이프를 시작했다. 출근한 지 20여 일이 지나서 첫 월급을 받고 첫 인센티브도 받았다고 좋아했다. 아직 첫 월세를 내지 않았지만 관리비는 냈단다.

다음 달부터 통장에서 큰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 집과 회사를 오가는 수고와 시간을 돈으로 샀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느낄 것이다.


회사 옆에 사는 덕에 작은애는 회사에서 주는 저녁까지 먹고 퇴근 후에 평일 요가 수업을 갈 수 있다.

그러나 혼자 살기 때문에 작은애는 경제적 부담을 책임지고 집안일도 스스로 해야 한다.

일단 해 보고 나중에, 이게 낫나 이건 어떤가 하면 또 그렇게 하면 된다.


나는 이 사회에서 월세 세입자인 딸들에게 '월세는 너희들의 힘'이라는 말을 해 줬다. 남의 집을 빌려 사는 에티켓을 지키되 집주인에 대해 '을'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나가는 돈이 이게 일 년이면 얼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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