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병제에도 징병제에도 진보는 없다
세상읽기 한겨레 2021.5.12
한겨레 권혁철 논설위원은 최근 칼럼에서 "'모병제는 진보' 도그마 경계해야"라는 제목으로 모병제는 ‘병역의 시장화’ 정책이며, ‘빈자의 군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진보적 가치에서는 오히려 경계해야 할 제도라고 주장한다. 한반도 평화가 자리잡기 전까지 ‘전쟁만은 안 된다’는 여론 조성을 위해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징병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모병제가 진보이고 징병제가 보수라는 이분법적 단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주장대로 모병제는 병역의 시장화 정책일까? 모병제를 실시하면 빈자의 군대가 되어 부자들에게만 유리해진다는 가정은 사실일까? 그리고 징병제가 전쟁을 억지한다는 담론의 의미와 효과는 무엇일까?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94755.html
첫째, 권혁철 논설위원은 모병제는 ‘병역의 시장화’ 정책인데, 왜 진보개혁 쪽에서는 철도, 수도 등의 공공서비스 민영화를 반대하면서 대표적인 공공서비스인 병역의 시장화, 민영화는 찬성하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병역의 시장화’는 징집제도 문제가 아니라 민간군사기업이 치안부터 전쟁까지 대행하면서 생겨나는 문제이며 민간군사기업의 역할과 범위 등이 주요 쟁점이다. 징병제라고 해서 민간군사기업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징병제하에서 제대군인의 재취업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민간군사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가 논의되기도 한다. 국가에 의한 징집 방식으로 징병에서 지원으로 바꾸는 모병제를 곧 시장화, 민영화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큰 비약이다
둘째, 모병제가 실시되면 빈자의 군대가 될까? 병역의무를 빈자들이 전담하게 되면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위험의 외주화라는 구조적 문제가 병역에까지 확산되는 윤리적 문제로 이어질 거란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군대가 모두 가고 싶지 않은 곳일 때 생기는 문제다. 모병제 도입으로 인해 오히려 불평등이 감소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모병제와 징병제의 소득형평성을 비교한 김대일의 연구를 보면 모병제를 통해 임금을 현실화하면 소득불평등이 개선된다. 물론 모병제는 현실적으로 군병력 규모의 축소를 동반하므로 소득 상승효과가 특정 계층 전반의 소득을 끌어올릴 정도는 되지 않으리란 반론도 있다. 하지만 임금소득보다 자본소득을 통해 부를 축적할 기회가 있는 부자들이 병역의무 기간 동안 빈자와 동일하게 소득이 억제되지는 않는다는 면에서 불평등 개선의 구체적인 효과는 징병제보다는 모병제를 통해 더 실현 가능하다. 물론 처우 개선이 이루어진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참고로 2020년 코로나로 인한 취업난 상황에서도 전문하사 충원율은 72.3%에 머물렀다.
셋째, 보편적 징병제로 전쟁만은 안 된다는 여론이 조성될 수 있다는 담론의 의미와 효과는 무엇일까? 군복무에 따른 위험이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면 정말 전쟁만은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될까? 현재 한국의 병력 규모를 감소할 수 없다는 논리의 핵심에는 유사시 북한군을 안정화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보편적 징병제는 ‘전쟁만은 안 된다’는 논리가 아니라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논리를 거쳐 강화되어왔다. 위험을 피할 수 없다면 다 같이 겪어야 공동체가 덜 위험해진다는 주장은 얼핏 평등해야 안전하다는 진보적 슬로건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정치인과 재벌의 자녀도 ‘일반인’들과 똑같이 군대에 간다면 더 사회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차별을 자인하는 사례를 통해 지지된다는 점에서 약자가 안전할 때 모두 안전해진다는 논리와는 ‘태생부터’ 다르다. 군대 내 인권 문제부터 처우 개선, 강제징집제도의 문제에 대한 얘기가 등장할 때마다 보편적 징병제를 더 강력하게 실시하자는 주장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누가 보편을 자임할 수 있고, 누가 ‘우리’를 대표하는지를 둘러싼 보편의 폭력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논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모병제가 진보라는 도그마도 경계해야 하지만 모병제에 대한 기존 ‘진보’의 비판 자체도 도그마에 빠져 있다. 모병제는 더 진보적이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조건에서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모두 이 고생을 예외없이 감내해야 한다는 식으로 징병제의 보편화를 보복적인 방식으로 주장하는 논리는 결국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병역의무에서 배제된 이들에 대한 증오만을 키울 것이다. 오랜만에 병역제도에 대한 공론장이 열렸다. 더 나은 논쟁을 원한다.
출처: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947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