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톡산 투여 및 부작용
루푸스, 루푸스신염 치료를 위해 소론도(스테로이드) 10알과 함께 시작된 싸이톡산 투여. 2주 간격으로 2박 3일의 입원과정을 거쳐 총 6번을 맞았다. 영양제처럼 당일 날 와서 맞고 바로 집에 가는 분들도 있는데, 나는 예외였다.
입원 첫째 날은 채혈을 통해 전반적인 컨디션 체크를 하고 둘째 날, 싸이톡산 투여 및 경과를 보게 된다. 그리고 셋째 날 아침 아무 증상이 없으면 퇴원하게 되는데, 부작용이 생기면 입원은 지속된다. 퇴원 후 일주일 뒤, 외래 진료를 통해 다음 회차 투여에 대한 여부가 정해지며 여기서 통과하면 일주일 뒤 또 입원이다. 이렇게 격주로 일요일마다 약 3개월간의 입원이 시작됐다.
싸이톡산은 항암제의 독한 성분으로 체내에서 빠르게 배출해 줘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수액과 물을 이용해 다량의 수분 섭취를 한 후 소변으로 배출시키는데, 들어간 만큼 나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소변의 양도 계속해서 체크해 줘야 한다. 따라서 병실 내 화장실은 필수였다.
그래서 6번 모두 화장실이 달린 2인실 병실을 이용했다. 2개의 환자용 침대 사이에 보호자 침대 1개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고 숨 막히는 병실이었다. 남은 1개의 보호자 침대는 병실 출입문과 화장실 앞 쪽의 작은 공간에 있고, 환자용 침대 발밑 쪽이다.
환자용 침대 사이의 보호자 침대는 항상 보다 더 위급한 환자의 보호자에게 양보한다. 나는 겉으로는 너무나 멀쩡해 보였기에 항상 양보하는 쪽이었다. 발밑, 그것도 화장실 앞에서 부모님이 자는 걸 볼 수 없어 입원 내내 혼자 밤을 보내곤 했다.
"우리 애는 하나도 안 아파요~ 나이롱환자예요.
그냥 주사 맞으러 입원했어요"
6번의 입원. 병실에서 새로운 분들을 만날 때마다 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이다. 처음에는 '나도 많이 아픈데 왜 나이롱환자라고 하지? 아프다고 하는 게 다 엄살 같아 보이나?'라며 서운했다. 하지만 이내 아버지의 말 뜻을 알게 되었다.
2인실의 특성상 주로 연세가 많으시거나 위급한 환자들이 많았는데, 아버지는 그곳에서 내가 괜히 겁먹고 의욕을 상실할까 봐 염려하셨던 거다. 그래서 병실에 있는 다른 분들이 날 아픈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게 미리 조치를 취하신 거였고, 딸을 위한 아버지의 무뚝뚝한 배려였다.
덕분에 같은 병실을 쓰는 분들이 내게 어디가 아픈 거냐며 묻지 않았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희귀 난치병 루푸스를 일일이 이해시켜줄 필요도 없었다.
'나이롱환자'
난치병인 루푸스도 감기보다 가볍게 만들어버린 아버지였다.
싸이톡산은 약 2시간에 걸쳐 정맥을 통해 들어왔다. 날 낫게 해주는 치료 약이지만, 수많은 부작용들을 생각하니 거부감이 들었다. 괜히 기분이 나빴고, 온몸이 화끈거렸다. 2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드라마도 보고, 게임도 하고 다양한 걸 시도했지만 찝찝한 마음에 30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2시간 동안 지속되는 건 팔에 꽂혀있는 주삿바늘을 당장이라도 뽑아내고 싶은 충동뿐이었다. 이토록 싸이톡산을 미워했던 탓일까. 첫 번째 싸이톡산 투여부터 부작용이 나타났다.
혈뇨. 싸이톡산 투여 후 첫 소변부터 혈뇨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몽에이드와 비슷한 색상. 루푸스 신염으로 단백뇨와 혈뇨는 꾸준히 나왔지만 이렇게 육안으로 보인 건 처음이었다. 한 번 나온 혈뇨는 이틀간 계속해서 나오게 되었고, 소변을 볼 때마다 종이컵에 담아 사진을 찍으며 색깔을 지켜봤다. 그렇게 2박 3일의 입원은 첫 회차부터 4박 5일로 늘어나게 됐고, 두려움은 배가되었다.
고열. 2~4회 차까지 밤부터 고열에 시달렸다. 심할 땐 40도 근처까지 간 적도 있는데, 아침이면 고열로 얼굴이 팅팅 부었다. 그리고 부어버린 눈 때문인지 시야도 흐릿해져 벽을 짚고 겨우 이동하거나 누워만 있었다. 유난히도 추운 병실의 밤공기. 고열로 이불도 덮지 못한 채 얼음주머니를 끼고 잠을 청하곤 했다.
탈모. 스테로이드로 인해 시작된 탈모를 싸이톡산이 가속시켰다. 주변에는 항상 떨어진 머리카락들로 가득했다. 아침마다 병실을 청소해 주는 분들이 "이거 다 아가씨 머리야?"라며 놀라실 정도. 싸이톡산이 항암제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복수. 어느 날부터 마치 수영장 위를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출렁출렁. 부종의 일종으로 배도 부은 건가? 하고 넘기려 했는데, 점점 심해졌다.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고, 음식을 먹는 것도 힘이 들었다.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배에 복수가 찼다고 한다. 이러다 병원에 있는 모든 진료과에 협진을 받는 건 아닐까 싶었다.
혈관. 6번의 정맥을 통한 싸이톡산 투여와, 외래진료 시 채혈검사로 인해 더 이상 주삿바늘을 찌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기본 2~3번의 시도 끝에 정맥을 찾을 수 있었고, 실패한 자리는 여지없이 멍 자국으로 가득 채워졌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멍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옷으로 팔을 가리고 다녀야만 했다.
그리고 우울증. '이겨낼 거야!'라고 수 백번 다짐을 했어도, 계속 생겨나는 부작용 앞에선 아무 힘이 없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은 수액줄에 잡혀있었고, 퇴원을 해서는 갖가지 약들에 작아져만 갔다. 원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부어버린 몸과 다 빠져버린 머리.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애써 참았던 눈물들이 병원에서 보낸 생일과 크리스마스 날에 터져버렸다.
밤마다 좁고 어두운 이 병실에 누군가와 함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내 또 마음을 다잡는다. 이런 내 생각을 안다면 가족들이 슬퍼할 테니까. 나는 아프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 아픈 건 더욱이 싫었다. 그렇기에 아픈 만큼 더 굳세어 보였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우울증에 빠져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침대에 누워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오직 하나. '나는 과연 다시 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였다.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부모님도 담당 역할이 생기셨다. 싸이톡산을 투여하는 2시간은 어머니와, 챙길 짐이 많은 퇴원 길은 아버지와 함께했다.
지독하게도 긴 2시간 동안 어머니는 말동무를 해주시곤 했었다. 하루는 피곤하셨는지 내 발밑에서 링거줄을 피해 엎드려 쪽잠을 청하셨다. 우연히 본 그 모습에 가슴이 꽉 눌린 듯 답답해졌다.
퇴원 시간이 되면 언제나 짠하고 아버지가 병실로 들어오셨다. 예민한 딸 때문에 이불과 베개까지 챙기느라 짐이 한가득이었지만 아무 말 없이 양손 가득 짐을 들어주시곤 했다. 아침도 못 챙겨드셨다고 짬을 내어 병실에서 빵을 드시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병원에 있다 보면 부모님을 간호하는 젊은 자녀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 사이에서 나는 아직도 부모님 보호를 받고 있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성인이 된 후에는 이제 부모님을 챙길 수 있다며 자신만만했었는데, 몸이 아프고 나니 다 허사였다.
병실 안에서 잠깐 누워있었던 어머니, 끼니를 챙겨 먹는 아버지의 모습만 보고도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맺혔는데, 입/퇴원을 반복하는 날 보며 부모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실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픈 게 더욱더 원망스러워졌다.
이토록 스테로이드가 육체적인 부작용으로 힘들게 했었다면, 싸이톡산은 정신적으로 나를 무너뜨려버렸다. 퇴원 기간에 다잡아놨던 마음이 입원 기간에는 많은 이유들로 가차 없이 패대기 쳐졌다.
병실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풍겼다. 과일향도 꽃 향도 아닌 특이한 향. 입원할 때마다 맡으니 그 향이 병원을 대표하는 냄새로 기억되었다. 퇴원하고 1년 정도 뒤에 새로운 요가학원을 등록했었는데, 그곳에서 같은 향이 났다. 요가를 할 때마다 풍기는 그 향은 입원생활을 끄집어내는 매개체가 되어버렸다. 마치 병원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재현되는 듯했다. 결국 2주도 다니지 못하고 환불 처리를 했다.
입원 기간과 동일하게 시작하고 끝났던 드라마가 있었다. 입원 기간에는 병실, 퇴원 기간에는 집에서 1편당 2~3번씩 돌려보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싸이톡산 투여가 모두 끝난 후, 그 드라마를 단 5분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분명 재밌게 봤었는데,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드라마를 상상하면 3개월간 했던 고생이 한 번에 다 떠올라 숨이 막힌다.
잘 버텨왔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은 아직도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거부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