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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묘 Jun 02. 2020

아픈 게 뭐 별거야?

루푸스 일상



 루푸스 확진을 받은 이후, 가장 먼저 4년 동안 다녔던 직장에 사직서를 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정확한 치료 계획이 나온 상태도 아니었지만, '나'를 위한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느껴 내린 결정이었다.

 

퇴사 전, 바쁜 일상에서 유일한 힐링은 여행 계획을 짜는 것이었다. 여유가 생기면 언제든 갈 수 있도록 장소부터 맛집까지 리스트에 차곡차곡 쌓아두곤 했다. 그런데 4년 만에 주어진 자유시간을 아프다는 이유로 집에서만 쓰게 되다니, 현실이 더욱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집에만 있기를 며칠 째, 아버지께서 본인 회사에 오후에라도 잠깐 출근을 하는 게 어떻겠냐며 물어보셨다. '우울증'을 염려한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으로 우울증이 있는 데다가, 내가 생각 많기로 유명한 AB형이어서 인지 가족 모두가 불안해하는 상황이었다.  


탈모로 인해 듬성듬성 있는 머리, 문페이스로 인해 빵빵한 얼굴, 조금만 앉아있어도 부어오르는 하체를 가지고 출근? 겁이 났다. 하지만 이대로 집에만 있다가는 무기력증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아니 오기를 부려보기로 했다. 남들처럼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를 통해 증명하고, 위안 삼고 싶었다.






 다시 출근을 마음먹으면서, 이전과는 다른 일상을 새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 첫 번째로는 요가.


아침 식사 후 항상 요가원으로 갔다. 집에서 요가원까지는 버스로 3 정거장이면 갈 수 있었는데,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5분이 힘들어 택시를 이용하곤 했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집에서 쉬지 왜 돈 아깝게 택시를 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의 목표는 '매일 꾸준히 하는 무언가'였다. 그렇기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요가 중에 잠이 든다 할 지라도, 우선은 요가원에 가는 게 더 중요했다.



 처음 요가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장 어려웠던 건 '시선'이었다. 퉁퉁 부어버린 몸과 주삿바늘로 인해 팔 여기저기에 들어있는 멍 자국.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며 혼자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어디가 아프냐며 물어보는 분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애써 웃어넘기거나 대답을 회피했다. 그런데 문득 '내가 아픈 게 잘못은 아니잖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정답이었다. 그 후로는 "신장이 좋지 않아 몸이 부은 상태고, 그거를 치료하려 입원해서 주사를 맞고 있다고" 짧게 설명하곤 했다. 아픈걸 다 밝히고 나니 마음이 훨씬 편했다. 이게 뭐 숨길 거라고.


오히려 타인의 시선보다 더 힘들었던 건 요가 그 자체였다. 부종이 심해서인지 가벼운 스트레칭에도 온몸이 찢기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다리를 이용한 동작을 할 때는 쥐가 나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럴 때면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주무르며 풀리기를 기다렸는데, 답답한 마음에 울컥하기도 했다.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라며.


하지만 절대 포기하진 않았었다. 모든 동작을 소화해내진 못하더라도, 가능한 많은 자세를 따라 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따라 하지 못한다 해도 굳이 실망하진 않았다. 다시 도전할 목표가 생긴 거였으니, '다음엔 할 수 있겠지 뭐!'라며 쿨하게 넘기는 방법도 터득해갔다. 이렇게 도전과 몸에 대한 타협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끝날 시간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온다. 명상.


요가 수업이 끝날 무렵 모든 불을 끄고, 누워서 명상하는 시간이 있다. 1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1시간의 수고를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요가보다 이 1분이 주는 희열에 중독된  같았다. 그리고 명상 끝엔 항상 칭찬도 잊지 않았다.

 

 '오늘도 성공했어! 나오길 잘했지? 내일도 또 해보자.'






 요가 후에는 점심시간에 맞춰 출근을 했다. 싸이톡산을 맞기 위해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느라 할 수 있는 일은 단순 업무뿐이었다. 반복적인 일이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에는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좋았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일에 집중하다 보니 아픈 걸 느끼지 못했었다. 집에만 있을 땐 온몸이 아파 밖에 나가는 걸 꺼려했는데, 나오고 나니 오히려 아픈  잊게 되었던 것이다.


또 집에서 무료할 때면 몸의 변화 하나하나를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원인, 증상, 치료법, 후유증까지 찾아보며 결국 나오는 최악의 상황에 겁을 먹곤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밖에 나와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아픈 걸 찾아볼 겨를이 없었다.  아픈 거 외에도 이야기할 거리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3일에 걸친 '회계 교육'을 신청하게 되었다. 장소는 지하철로 약 1시간 정도 가야 하는 거리로 그 당시에 큰 도전이었다.


부종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했던 터라 아버지께서 3일 동안 교육장소까지 데려다주셨었다. 교육장 안에는 여러 회사에서 온 담당자들이 앉아 있었고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들 옆에 앉았다. 점심시간에는 다 같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하루 8시간의 교육을 들으며, 그 순간은 병실 안의 환자가 아니라 일반 회사원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교육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허벅지와 종아리, 발목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하체부종이 심각해졌다. 발등이 부어 올라와 운동화도 신을 수 없었고, 다리가 너무 무거워 몇 시간이고 누워만 있어야 했다.


 

 교육 둘째 날, 혼자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어야 했다. 다리는 이미 부을 때로 부어올라 바지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고, 온몸의 하중이 밑으로 쏠려 다리 한쪽을 들어 올리는 것도 힘에 부쳤다. 지하철 곳곳에 있는 계단도 손잡이를 잡고서야 팔 힘으로 한 칸씩 올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퇴근시간이라 지하철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찼고, 역시나 앉을자리도 없었다. 출입문 손잡이를 잡고 창 밖을 보며 10여분 정도 지났을 때, 갑자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선 채로 굳어버린 것이다. 응원 막대 풍선에 바람이 가득 차있으면 접히지 않는 것처럼, 빵빵하게 부은 다리는 앉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갑자기 왜 이러지?' 온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내 상황이 창문에 비쳤고, 그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터져버렸다. 퇴근길이라 유독 조용했던 지하철 안에서 나는 고개를 숙였고, 소리 없는 눈물만 바닥으로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무서웠다. 그리고 서러웠다. 아프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의 범위가 좁아지고, 하고자 하는 의지가 꺾여버리는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나더러 어쩌라는 걸까. '아직 젊은 나이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할까?' 바닥에 떨어지는 게 눈물이 아니라 마치 나의 미래 모습처럼 보였다.

 

 

얼마큼의 시간이 흐른 후였을까? 진정을 되찾자 뭉친 다리는 풀리기 시작했다. 그 날 내 다리 상태를 본 부모님께서는 교육을 중단하는 게 어떻겠냐며 걱정하실 정도였다.


부모님의 걱정은 백번 이해하고 나 또한 겁이 났지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이틀 동안 어떻게 다녔는데!' 해 내고 싶었고, 할 수 있다는 걸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누구에게는 기껏 3일짜리 교육이었겠지만, 나와 가족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감정이 담긴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나는 수료증을 받았다. 약 30명 정도 되는 교육생들 사이에서, 그들과 똑같이 교육을 끝낸 것이다.






 루푸스 확진을 받은 이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과연 전처럼 생활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간단한 일상생활조차 용기를 내야만 할 수 있고 또 그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아 '도전=좌절'이 되어버리는 현실이 버거웠다. 그래서 모든 걸 단절해버렸었다.


밖에 나가는 것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틈만 나면 들어갔던 SNS도 끊어버렸다. SNS에서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면 루푸스가 한없이 원망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변한 모습을 변명하듯 설명하는 게 자존심 상했다. 또 동감을 원하는 나에게 '동정'을 보내는 사람들의 시선도 달갑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루푸스란 큰 벽안에 갇혀 혼자 꼬일 대로 꼬여있었다.


동시에 현실이 힘든 만큼 이 지긋지긋한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커져만 갔다. 그렇기에 사소한 거라도 어떠한 '책임감'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아프지만 무언가를 해내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주입시켰다. 요가, 출근, 회계 교육이 그랬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통해 무너져 버린 자존감을 회복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의 노력이 우선이란 걸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삶을 모방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다르다고 해서 숨을 필요도 없다. 할 수 있는 선안에서 나만의 일상을 만들어가면 되는 거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남들과 똑같이 생활할 수 없다고 혼자 우울하게만 보냈던 시간들이 아까워졌다. 나에게도 그들과 똑같이 주어진 값진 시간이었는데!


 아픈 게 뭐 별거라고.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었다.







 얼마 전 같이 루푸스를 앓고 있는 동생을 만났었다. 서로 연락이 뜸했던 사이에 많은 일들을 겪은 듯했는데, 마음고생이 너무 심해 극단적인 생각도 여러 번 했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동생을 잡아준 건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였다고 한다. 본인이 없으면 강아지 밥은 누가 주겠냐며, 그 생각에 정신이 들었다면서 말이다. 힘들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강아지를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동생은 다시 한번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미리 연락하지 못한 게 너무 미안했고 동생을 지켜준 강아지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이렇듯 책임감은 힘든 상황에서는 부담을 주기도 하지만, 하루를 견뎌내는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니 아프다고 해서 '난 아무것도 못해!'라는 무기력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았으면 한다. 그리고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이를테면 화분에 물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화분이 살아가기 위해선 ''라는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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