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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묘 Jun 04. 2020

꺼져버려, 루푸스!

나를 더욱 힘들게, 또 강하게 만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루푸스를 가볍게 생각하게 됐다. 스테로이드와 싸이톡산의 온갖 부작용도 익숙해지고, 또 '약 때문이니까 줄이면 없어지겠지'라며 깊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통증을 느끼거나 약 먹을 때만 제외하면, 아프단 걸 잊고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의 걱정은 커져만 갔다. 부모님을 통해 체질개선 클리닉, 한의원, 면역증진 식품 등을 시도해보는 게 어떻겠냐며 계속해서 제의가 들어왔다.


루푸스는 자가면역질환이다. 이걸 단순히 '면역력 부족'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엄연히 다른 부분이다. 자가면역 질환은 면역계의 이상으로 자신의 인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때 면역을 증진시켜버리면, 인체를 공격하는 자가면역도 같이 힘이 강해져 루푸스 활성도가 올라간다. 그래서 오히려 루푸스를 치료할 때 주로 사용되는 약은 마이렙트와 같은 '면역억제제'이다. 그런데 이 또한 문제는 있다. 루푸스의 활성도를 낮추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사용하다 보면, 몸 전체의 면역도 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면역억제제를 사용할 때는 감염에 특히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이렇듯 루푸스는 면역에 특히 민감하기 때문에 '면역'과 관련된 건 식품일지라도 주치의와 상의를 해야 하며, 절대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 그런데 루푸스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면 '면역증진'을 타이틀로 홍보하는 여러 상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루푸스 완치에는 면역증진이 최고라며 광고를 하는데, 볼 때마다 그들의 무책임함에 치가 떨린다. 환자야 어찌 되던 돈만 벌면 된다는 건가?






 퇴근 무렵, 부모님께서 지인 한 분과 처음 보는 정장 차림의 두 분을 모시고 회사로 들어오셨다. 부모님 지인의 소개로 같이 온 두 분은 40대 여자 1명과, 30대 남자 1명이었다. 그리고는 나를 불러 그들 앞에 앉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고 있을 때, 그들은 의학 책자를 하나 보여주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루푸스는 몸을 구성하는 면역세포들끼리 서로 통신이 원활하지 못해 자가면역이 일어나는 거고, 책자에 있는 가루를 먹으면 해결된다고 한다. 본인도 예방차원으로 꾸준히 먹는다며 책자에 담긴 논문들도 보여주었다. 그들이 설명하는 약은 동그란 원통에 하얀색 가루들이 가득했는데, 종류도 다양했고 한 통에 10만 원에서 20만 원대까지의 금액이었다. 세트로 구입하면 50만 원도 넘어 보였다.


반응이 없자 그들은 날 설득하기 위해 더 열을 올렸다. 계속되는 설명에 "그래서 이걸 얼마나 먹으라고요?"라고 물으니 황당한 답이 돌아왔다.



"일반인들은 보통 2~3 스푼씩 물에 타 먹으면 되는데, 루푸스로 면역이 떨어진 상태니까 10스푼 이상은 드셔야 해요!" 라며 말이다.



보통 몸에 이상이 있으면 부작용을 고려해 작은 양부터 시작해서 경과를 보고, 늘려 나가는 게 안전한 방법이다. 그런데 아프니까 처음부터 많이 먹어라? 면역 관련 약을? 과연 이 사람들이 루푸스에 대한 지식은 있는 건지부터 의심됐다. 어이가 없어 당장이라도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부모님 지인분의 소개로 오신 분들이었으니 최대한 예의를 갖췄고, 담당 의사 선생님과 상담 후 답을 줄 테니 책자만 두고 가시라고 했다. 그러자 의사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처방하는 양약만 먹으라고 한다며, 물어볼 것도 없다고 한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은 병원 약 잘 먹고 있고, 몸 상태도 점점 괜찮아지고 있으니 좀 더 생각해 본다며 다시 한번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설명하던 남자가 다급했는지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먹는 건 독약이에요"



라고 말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독한 약도 아닌 독약을 먹고 있다니, 병원 약을 한 줄기 희망 삼았던 나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다.


 저 사람들 눈에 나의 아픔은 단지 돈벌이 수단이었다. 안 그래도 희귀한 루푸스 환자인 데다가, 한 번에 10스푼 이상씩 먹어야 하니 몇 통씩 쟁여갈 일명 호갱쯤으로 보였겠지.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 한들 말은 가려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저 사람들은 과연 알고 있을지 지금도 궁금하다. 돈에 눈멀어 뱉은 말을 5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비참함이 몰려왔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아무 말도 못 하고 지켜보는 부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자식이 아프니까 부모님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상황들을 겪고, 이런 쓸 때 없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자체가 숨이 막혀왔다. 대체 부모님이 왜? 내가 왜?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을 겪어야 하는지 하늘에 따져 묻고 싶었다.



 독약이란 말을 듣고, 아무 대답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계단에 주저앉았다. 한 참을 멍하니 바닥만 봤다. 온갖 잡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고, 그 와중에 울지 않으려 애썼다. 한 번 터져버리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들어간 사무실, 부모님이 나를 불러 앉히고 말씀하셨다.



"지금 제일 답답한 건 너인 거 알아, 그런데 뭐라도 해봐야지. 아까 설명 들은 거 한 번 먹어보는 게 어때?"라고 말이다. 겨우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나보고 독약을 먹는 다잖아! 어떻게든 나아보려고 약도 잘 먹고 있었는데, 그게 독약이래!!"라며 화를 내버렸다.



 부모님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잘못이라면 내가 아픈 게 전부였다. 아픈 자식을 볼 수밖에 없는 부모님은 오죽하셨을까. 날 겁주려 뱉은 말들이 부모님에게는 당장 오늘의 일처럼 무섭진 않으셨을까. 그러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내 눈치 보시며 한 번 더 건넨 말은 아닐까. 부모님의 마음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다만, 나로 인해 흔들리는 걸 보기 싫었을 뿐이다.



 "나는, 루푸스도 다른 병이랑 같다고 봐. 그래서 나을 수 있고,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결국 나오고야 말았다. 성인이 된 이후 부모님 앞에서 처음 보인 눈물이다. 루푸스 확진을 받을 때도, 힘든 입원생활을 반복하면서도 가족 앞에선 억지로 참아왔던 눈물이었는데... 그리고 뒤이어



 "엄마 아빠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당장 죽을병에라도 걸린 거 같아 무섭잖아!" 라며 참아왔던 모든 걸 터뜨려버렸다.



 분했다. 몇 개월 동안 했던 수많은 다짐과 노력들이 10분 남짓 만난 남자의 한 단어로 산산조각 나버렸다. 아마도 나는 '괜찮아야 해'란 강박 안에서 억지로 웃으며, 힘겹게 버텨왔던 거 같다. 그러니 아무 일면식도 없는 남자의 독약이라는 말에 '그동안 내가 틀렸던 거구나.., '라며 쉽사리 무너져 내린 거였다.






 그날 이후 지독한 우울증이 왔다. 여러 번의 크고 작은 우울증들을 겪어왔지만 이번엔 달랐다. 삶의 의지가 없어져버렸다. '어떻게 하면 사라져 버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고, 걷는 발걸음마다 죽는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한테 가장 위험했던 건 찻길. 횡단보도의 빨간색 신호등만 보면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을 쳤다. '지금 뛰어들면 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건가? 그러면 모두가 편해질까?'라는 생각에 몇 분씩 신호등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직접 운전을 하는 날이면 전봇대, 벽 할 거 없이 어디든 박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지속되었다.


'죽을 용기로 살면 되지 왜 죽냐'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막상 죽는 모습을 습관처럼 상상하다 보니, 용기는 필요가 없었다. 너무나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용기가 있어 죽음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죽는 게 가장 쉬어 보일 정도로 삶이 힘든 거였다. 이렇게 우울증은 최악의 상황까지 나를 내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꼭 뒤따라 오는 생각들이 있었다. '내가 죽으면 슬퍼할 가족들은? 그리고 길가다가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무슨 잘못이지? 어쩌면 최고로 행복한 날을 보낸 사람일 수도 있는데, 나 때문에 그 하루를 망친 거라면?' 등 말이다. 그리고는 '바보같이 남 생각하느라 죽지도 못하는데!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라며 하늘을 원망해본다.



 




 우울증에 빠져있기를 몇 날 며칠, 외래 진료 날이 왔다. 의사 선생님께 지난번에 받은 의학 책자를 보여주고, 이런 게 있다는데 먹어도 되겠냐?라고 여쭤봤다. 대답은 간단했다. "의사인 나도 처음 보는 말들 뿐이네" 라며, 사기가 확실했다.


갑자기 억울해졌다. 충분히 잘 버티고 있었는데 고작 사기꾼의 한마디에 이렇게 흔들리다니, 내가 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그 사람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날 나약하게 만들어 조급한 마음에 본인한테 연락을 하게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사람의 뜻대로 날 놓아버리기 싫었다. 다시는 그런 사기꾼이 나와 내 가족들한테 접근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내 의지를 바닥까지 끌어내렸던 사람이 나를 더 악착같이 만들어버린 거다.    

 

 나에게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일으켜 세우는 3개의 문장이 있다.


 첫 번째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준다.

 두 번째  모든 일은 끝이 있기 마련이다.

 세 번째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준다 했는데, 하늘이 보기에 나는 꽤나 큰 사람인가 보다. 루푸스로 인해 많은 시련들이 있지만, 그쯤은 거뜬히 이겨낼 거라 판단하신 듯하다. 그러니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시련을 통해 알아가라는 하늘의 뜻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일에 끝이 있듯이, 루푸스도 그럴 거다. 그 과정이 좋았다면 추억에 남기고, 나빴다면 경험 삼아 다음번에 좀 더 수월하게 헤쳐나가면 되는 거였다.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 잠시 방황했을 뿐이다. 어려울 건 없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오히려 신이 내 가치를 높게 평가했구나라며 자만도 부려봤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너한테 절대 안 질 거야! 꺼져버려, 루푸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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