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도시의 백화점 한편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이다. 코로나로 한참 힘들었는데 새로운 전환을 꿈꾸며 이제 조금 여유를 부리며 또 다른 매장을 준비 중이다. 새벽에 일어나 핸드폰부터 체크한 후 7시에서 8시까지는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바쁜 출근시간이지만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주춤거림도 없이 우리 집 사랑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나와 사랑이의 운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라도 나는 풀향기를 맡고 싶어서다.
집 주변 작은 산책 기이지만 그들이 온생을 다해 뿜어내는 향을 온몸으로 느낀다. 작년에 비해 열매를 적게 맺은 살구나무지만 그 소중한 살구선물들을 하나둘 집어보고 빨갛게 흐드러지게 폈던 장미들이 벌써 별을 품은 모습에 나는 그들을 내 기억에 심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풀들의 안내를 받으며 길가를 걷는다.
다양한 풀들 속에서 항상 내게 믿음을 주는 풀은 단연코 질경이다. 나이가 50이 넘어서인지 바람불 땐 바람맞고 비가 올 땐 비를 맞는, 순리대로 사는 삶이 내 삶이길,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나는 더 나답게 사는 것에 열심인데 나다움이란 뭘까를 가만 고민하며 나를 들여다보니 나는 꼭 질경이를 닮은 것 같아서다.
지금 내 발 끝에 채일대로 채이는, 아무도 거 뜰 떠보지 않지만 너무나 질기게, 씩씩하게 자라는 질경이. 질겨서 질경이, 넓은 대지 놔 두고 굳이 사람들 발에 치이는 길(질) 가에 많이 자라서 질경이, 과거 마차가 잘 다니는 곳에 자라며 죽어가던 말도 살려냈다는 그 질경이. 나는 질경이를 닮았다.
남들은 내게 고생을 사서 한다고 할 정도로 나는 또래의 아줌마들과는 다르게 좀 억척스럽다. 편하게 여행이나 다니며 인생을 즐기라고들 하는데 나는 또 매장을 오픈하고 온라인마케팅을 배우느라 진땀내고 글을 쓰며 나를 기록하고 출간을 앞둔 시를 다듬고 매일 산책하며 풀들과 대화를 나누는, 나는 질경이를 닮았다.
살짝 고백하자면, 과거 나는 숲해설가였다. 자연이 좋고 풀과 나무가 좋고 그 속에서 숨 쉬는 것이 너무 좋아 이렇게 좋은 것을 나누고자 나는 숲해설자격증을 따고 아이들에게 숲을 알려주는 전도사를 자처했었다. 질경이에 대해 아이들에게 알려주고는 질경이로 재기를 만들어 차기도, 질경이를 봉투에 담아 나물을 만들어 먹으라는 당부도, 꽃이 꼭 좁쌀을 닮은 조팝나무의 어린잎을 따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자연이 우리의 일상과 얼마나 가까운지, 얼마나 많은 놀거리를 제공하는지, 자연이 무한정 주는 많은 것들이 너와 너의 친구들을 동화시켜 가는지,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생명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는 숲이, 그 속의 나무와 풀들이 나는 너무 좋다.
그래선지 장사하기도 버거운데 매장이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는 숲을 찾는다. 멀리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까운 산이나 들로 나선다. 물론 자율이 보장되는 자영업자이기에 시간이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고객관리, 직원관리, 매출관리 등 할 일이 산더미인지라 이 모든 것들의 갑갑과 각박을 해소, 환기시키기 위해 나는 나의 친구들이 잔뜩 기다리는 숲으로 간다.
숲을 찾는 내 마음을 아는 듯 숲에서 나는 '한 사람으로서의 나'를 오롯이 느낀다.
태양도, 바람도, 나무들도, 나무 사이 다람쥐, 벌레, 잡풀들까지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함을 느낀다.
매장에서 나는 고객중심, 직원중심이지만
숲에서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매장에서 나는 영리하고 빠르게 움직여야 하지만
숲에서는 순수하고 느리게 움직여도 모든 것이 나를 배려함을 느낀다.
매장에서 나는 철저하고 깔끔해야 하지만
숲에서는 다소 모자라도 발에 흙이 묻어도 숲 속의 요정들이 날 씻겨주는 느낌을 갖는다.
숲의 산책로에도 질경이는 여전히 널브러져서 자기 맘대로 피어 있다. 다리를 반으로 접고 등을 휘어 질경이 가까이 눈을 맞춰보니 '자세히 봐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주 1)'를 적은 시인의 마음이 살짝 내게도 느껴진다. 어찌 이리 질기게 사는지, 밟혀도 왜 울지 않는지, 아무런 무기도 없으면서 이리 보드라운 살결로 어찌 살려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사랑스럽고 예쁘다. 작은 체구에 별다른 무기 없이 세상에 두 팔 걷어붙이고 씩씩하게 하루를 사는 나도 질경이 같아 가슴이 애잔하지만 세상이 나를 예쁘게 사랑스럽게 여겨주길 바란다.
이 작은 풀꽃에게 분명 내 마음이 전해졌으리라. 가만히 있던 나뭇잎이 살짝 흔들렸고 거미가 거미줄을 타고 내려왔고 질경이의 보드라운 이파리가 햇빛을 받아 살짝 반짝였다. 숲에선, 자연에선 영혼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나 역시 풀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저 자연이 탄생시킨 하나의 부식물에 지나지 않으니까 여기선 여기의 방식으로 나는 대화를 나눈다.
어떤 사람이 정당한 이유로 슬퍼한다면 자연 전체가 그 영향을 받을 것(주 2)이라니 나의 애잔함을 이 작은 풀꽃이 달래줄 것이라 여기며 나는 끝없이 나의 감정을 이 여리디 여린 친구에게 쏟아낸다.
이 시대에 자영업자로 산다는 것은 생존을 너머 어떤 가치를 가슴에 담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고 높은 산에 오르는 이가 멀리 보고 오래 기다리는 이가 물고기를 낚는다는 식의 성실 근면으로는 더 이상 삶의 질을 논하기 어려운 시대라지만 나는 여전히 미련스럽게 삶의 질긴 굴곡을 그래도 아등바등 걸어가고자 걸음마부터 배우고 있다. 온라인마케팅을 배우고, 자영업자로서의 성공마인드를 익히기 위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이 모든 기록들이 혹 나 같은 처지의 수많은 자영업자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글을 쓴다. 그러면서도 내 삶이 노동으로 점철되지 않고 고결한, 순수한 본질을 잃지 않길 바란다. 그것으로 나의 가치를 고양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남들 눈에 억척스럽게 일하고 바보처럼 숲으로 향하는 내가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저 아래에서 기다림에 지쳐 엄숙해지고 창백해지고 누렇게 뜨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주 3)
바보처럼 보일지라도 누렇게 뜨는 삶을 거부하기 때문일까,
나는 오히려 질경이 닮은 나이길 자처한다.
질기다는 것은 본질을 부여잡고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억척스럽다는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버틴다는 것은 아픔을 지나 보내고 곧 나아진 지점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일정한 쉼이 없는 자영업이지만, 그 속에서 찾아오는 꿀 같은 하루 쉬는 날 숲에서 보내는 나의 일상을 나는 사랑한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사는 풀이 있고 어두운 그늘에서 자라는 풀이 있듯이 나의 삶에도 빛이 있고 어둠이 있겠지. 이는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을 대하느냐의 내 마음과 정신의 몫이리라. 화려한 백화점 내 매장과 사람 없는 숲 속의 하루.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나는 내 삶을 양분하여 하나로 이어간다. 안전한 곳을 제쳐두고 밟히는 쪽으로 가기도, 쓸리는 쪽을 제쳐두고 편안한 쪽으로 가기도. 내 삶의 양분은 결국 '나'라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에 나는 오늘도 나를, 나의 삶을 자연의 일부라 여기며 온전히 나로서 쓰여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