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날 깜짝밥상

by 꼭두


‘우리 자식들의 엄마로 살아줘서 고맙다’


제가 처녀 때 쯤, ‘어머니날’이라는 게 생겼어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마을에도 그 소식이 전해졌지만, 대부분 ‘별 날이 다 있네’ 할 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더군요. 그 마을에서 제가 결혼을 하고 힘겨운 종가집 맏며느리 시집살이를 할 때까지도 그랬습니다.


5월 8일이 되어본들 “오늘은 어머니날이다”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성인권’이라는 단어 자체를 듣기 힘든 시절인 탓도 있었을테고, 게다가 그 작은 시골마을에서 평범한 여성을 위한 이벤트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답니다.


훗날, 이날이 ‘어버이날’이 된다는 걸 그때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요. 남편과 둘이서 서울에 올라와 살다보니 서울은 정말 딴 세상이더군요. 서울은 원래 그런 분위기였던 건지, 그 즈음부터 그날이 흥하게 된건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한마디로 ‘어머니날’이라는 게 엄청 큰 날이더라구요.


그날 아침이 되면 아이들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엄마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며 노래까지 불러요.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뭔가 가사와 멜로디가 뭉클한 그 노래 말이죠. 아이들이 있는 엄마들은 하루종일 그 꽃을 달고 다니죠. 가슴에 한껏 힘을 주고요.


자식들만이 아닙니다. 남편도 아내를 챙겨주는 날입니다. 세상 무뚝뚝한 제 남편도 서울물을 먹어서 변한 건지,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날이 되면 저녁에 나를 데리고 나가 맛있는 것도 사주고 소소한 선물도 주고 하더라니까요. 정작 자기 어머니한테는 여전히 그러지 않으면서 말이죠.


‘우리 자식들의 엄마로 살아줘서 고맙다’ 같은 느낌이었고, 뭔가 엄마라는 자격으로 대접받는다는 게 그렇게 기분좋은 일인지 처음 알았어요. 가진 것 없이 서울 올라와 남편과 둘이 일구어가야 하는 가난한 객지생활에서, 하루라도 그 고단함을 잊는 순간이 어머니날의 행복이었습니다.


“오늘 꼭 일찍 퇴근하셔야 해요”


제 나이 서른을 넘기던 무렵, 오랜 셋방살이를 마감하고 드디어 홍은동 언덕땅을 사서 서울 우리집을 지었습니다. 너무 기뻤지만 집짓기에 모든 돈을 털어 넣었기에 살림은 더 팍팍했고 저도 무엇이든 해야 했어요. 그래서 시작한 부업이 식품포장 일이었습니다. 가내수공업 수준이었지만 엄연한 직장이죠.


남편이 출근하고 당시 국민학교 3, 4학년이던 연년생 딸, 아들이 등교를 하고 나면 저도 늦은 출근을 합니다. 해가 떨어질 무렵이 돼야 허겁지겁 집에 돌아와보면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그때까지 밥을 못 먹어 배고픈 채로 엄마만 기다리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늘 그게 미안했죠.


부랴부랴 밥을 해서 아이들을 먹이고 청소와 집안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남편도 퇴근해 돌아옵니다. 다시 겸상을 차려 남편과 함께 늦은 저녁을 먹는 게 당시 제 생활이었습니다.


어느날 아침, 아이 둘이 학교 가기 전 제 앞에 나란히 서더니 제 가슴에 카네이션 꽃을 달아줍니다. ‘어머니의 마음’ 그 노래도 불러주고요. 한참 바쁘게 정신없이 살던 때라 놓치고 있었는데 달력을 보니 5월 8일이네요.


놀랍게도 카네이션이 생화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국민학생 아이들이 색종이로 만든 조화를 달아주던 시절이었고, 저도 생화를 받아보는 건 처음이었어요. “너희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생화를 다...”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 해서 더 묻지도 못했네요.


옆에서 흐믓하게 이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남편에게 노래를 마친 딸아이가 다가가더니 “오늘 꼭 일찍 퇴근하셔야 해요, 꼭이요” 하며 속삭입니다. 그때만 해도 쟤가 왜 그러는지 저는 전혀 몰랐어요. 남편도 이유는 말해주지 않는 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출근이 늦었다며 서둘러 나가더군요.


출근하고 보니 아이들이 있는 어머니들은 다 카네이션을 달고 있는데 저만 생화더군요. 일하는 내내 괜히 으쓱했죠.


부랴부랴 일을 마치고 평소처럼 허겁지겁 집에 들어서는데, 어라~ 온 집안이 깨끗합니다. 마당도 단정하고 마루는 물론이고 방마다 온통 다 반짝반짝 빛이 나요.


새하얗게 빛나는 브로치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하며 딸, 아들이 인사를 하는데 평소의 배고픈 표정이 아니고 아주 의기양양합니다. 칭찬은 아직 이르다는 듯 바로 돌아서며 안방문을 열어 보이는데 보자기가 곱게 덮여 있는 밥상이 있네요. 보자기를 벗겨보려 하니 안 된답니다. 아빠가 와야 한대요.


온 집안 청소를 다해놓고, 밥과 반찬을 만들어 엄마와 아빠를 기다린 딸과 아들.


청소는 그렇다 치더라도,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건 이제 갓 국민학교 3, 4학년인 어린 제 아이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일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었고 조금도 기대해본 적 없는 풍경 앞에서 저는 거의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요즘 말로 하면 어머니날 기념 초특급 서프라이즈 이벤트 앞에서 말이죠.


잠시 후 남편이 돌아오자 아이들은 여전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상보를 벗기고 아랫목 이불에 묻어놓은 밥그릇을 꺼내 상 위에 올립니다. 된장찌개와 김치, 계란후라이, 당시에는 꽤 귀했던 소시지부침까지 상이 제법 구색을 갖췄어요. 아빠 밥 속에는 제가 늘 그랬던 것처럼 날계란 하나를 파묻어 두었고요.


저도 남편도 그저 놀라움과 고마움 속에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이제는 의기양양한 표정이 다 사라진 아이들이 초조한 눈빛으로 저희 부부를 쳐다봅니다. 이제 맛 평가와 칭찬을 해줘야 할 때가 된거죠. 무슨 말이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고맙구나, 맛있구나, 고생했다”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더 보탤 말은 떠오르지도 않고요.


끝이 아니었어요. 밥을 다 먹자 아이들이 정성껏 포장한 작은 상자를 제게 내밉니다. 열어보니 세상에나~ 새하얗게 빛이 나는 브로치가 나옵니다. 너무 이뻐서 저절로 웃음이 나오면서 감탄을 했죠.


게다가 무려 명동의 미도파백화점에서 사왔답니다. 당시 서민들에게는 꿈의 장소였던 백화점. 서울에서도 도심에 있는 화신, 코스모스, 미도파 이렇게 3개 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 그때까지 백화점에서 제 물건을 사본 적은 한번도 없었고요.


감탄과 감동은 좋은데... 이쯤 되니 저도 남편도 궁금함을 넘어 불안해지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용돈 쥐어준 적도 별로 없는데 이걸 다 어떻게 마련한건지 묻지 않을 수 없었죠.


잊지못할 그해의 ‘어머니날’


아이들의 설명은 놀랍다 못해 기가 막히더군요. 이걸 해내기 위해 한달동안 ‘석간신문’ 배달을 했답니다. 어린 국민학생을 써주는 신문보급소도 있냐 했더니 부모님 동의서를 받아오라 했는데, 어른 글씨 흉내를 아주 잘 내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써냈고 그걸로 통과됐답니다.


엄마에게 카네이션 생화를 달아주고 싶었고, 도시락에 소시지반찬을 매일 싸오는 부잣집 친구가 참 부러웠는데 엄마와 함께 잔뜩 먹고 싶었답니다. 이쁜 브로치를 늘 하고 다니는 학교선생님이 있었는데 우리 엄마 브로치도 사고 싶었대요.


저는 부업을 다니는라 그 오후의 일들을 까맣게 모를 수밖에 없었고, 그러고보니 요즘 한달동안 아이들이 부쩍 배고파했던 기억만 나더라구요. 이게 꾸짖을 일인지 칭찬할 일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더군요.


“고생했다. 정말 고맙다. 그런데 말이다. 신문배달은 당장 그만두거라.”


“안그래도 소장님께 그만둔다고 말씀드렸어, 실은 너무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더라고” 하며 웃네요. 100부가 넘는 신문을 팔에 다 끼울 수 없어 힘들었던 이야기, 큰 개가 있는 집에 신문 넣기, 빠트린 집 다시 찾아가서 넣고 오기 등등 아주 힘들었대요.


다시는 이런 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을 뿐, 아이들에게 더는 뭐라고 훈계할 수는 없더군요.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이제 다 끝난 일이라고 하는 마당에 말이죠. 사실 기특하고 고맙지만 미안한 일이고요.


감동과 고마움, 칭찬과 놀라움이 뻥뻥 터졌던 잊지못할 그해의 ‘어머니날’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우리 부부는 틈만 나면 그날의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그 작은 손으로 신문배달을 해서 백화점을 다녀오고 밥상을 만들었던 우리 아이들. 정말 잔망스러운 아이들이라면서 말이죠.


마지막 ‘어머니날’의 기억


어머니날이 너무 인기가 좋아 그랬을까요. ‘왜 아버지날은 없냐?’는 아빠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더니, 그 이듬해인가, 결국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바뀌더군요.


저는 솔직히 불만이었어요. 그냥 ‘아버지날’을 따로 만들면 되지, 왜 ‘어머니날’을 없애는지 아주 서운하더라고요. 아마도 그해 어머니날에 누린 단독감동은 이제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이었을지도 모르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밥상 맛은 솔직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먹을 때도 그랬어요. 그냥 ‘이거 너무 맛있다, 맛있는게 맞다’ 했던 기억만 있습니다.


그해 어머니날 온통 반짝거렸던 우리집, 너무 맛있었던 깜짝밥상, 새하얗게 빛나던 브로치, 그 모든 것들이 제가 지금까지 평생 받아본 그 어떤 값비싼 선물보다도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언제 생각해도 꿈만 같았던 하루였고요.


브로치는 하기조차 너무 아까워서 정말 아끼고 아끼며 지금도 깨끗하게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물건 잘 간수할 줄 모르는 덜렁이지만 그것만큼은 잘 간직한 채 가끔씩 들여다보며 그해 그날의 행복을 떠올려보곤 하지요.


아이들 학년으로 새삼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50년을 훟쩍 넘겨 거슬러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1971년 5월 8일, ‘어버이날’로 바뀌기 전 거의 마지막 ‘어머니날’의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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