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역몽 05화

가난과 폭력 속에서 지나온 날들 4

그림속 영웅을 기다리던 아이

by 슬기롭군

여덟 살의 나는 앙상했다.
늘 배가 고팠고, 매일같이 마가린 간장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버티고 있었다.
기억 속 나날들은 온통 ‘버텼다’는 말로 채워진다.


어느 토요일,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대문을 열자 마당 한가득 집안의 가구와 물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빠가 또 술을 마신 것이다.
무엇인지 모를 분노에 사로잡혀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부쉈다.
그 안에는 가족들의 소중한 물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날,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엄마가 애지중지 모아두던 요리책들이었다.
책장은 찢어지고, 책등은 떨어져 나가 있었고, 그 잔해를 품에 안고 주저앉은 엄마는 묵묵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있었다.

요리책이 있어도, 엄마는 우리에게 마음껏 맛있는 음식을 해줄 수 없었다는 걸.
매일같이 마가린 간장밥으로 끼니를 버텨내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엄마는 스스로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며칠 후, 엄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사라졌다.
아마도 그 삶에, 그 고단함에 지쳐버린 것이었겠지.


엄마가 떠난 후, 아빠는 냉장고 문을 열어보이며 말했다.
“마가린, 참기름, 간장 있으니까 꺼내 먹어라.”

냉장고 안은 텅 비어 있었고, 한쪽 구석엔 김치 한 통과 계란 몇 알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로 우리는 남겨진 날들을 버텨야 했다.

어느 날, 아빠는 내 손을 잡고 골목길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도저히 키울 자신이 없다. 고아원에 가는 건 어떻겠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나는 그저 어딘가로 버려지는 기분이었다.
“잘못했어요.”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아빠에게 잘못했다고 빌었다.
왜 그토록 매달렸는지, 무슨 죄를 지은 것인지도 모른 채.

부모가 있는데 왜 나는 고아가 되어야 하는 걸까.

그날,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더 착한 아이가 될게요. 그러니까 보내지 말아 주세요.”

아팠지만 참아야 했다. 배가 고파도 울면 안 됐다. 무서워도, 슬퍼도, 혼자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내게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시간이 있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내 마음을 그려내는 시간.
등장인물에게 말풍선을 달아, 내가 겪은 고통과 바라던 미래를 조용히 그려나갔다.

내 만화의 주제는 늘 비슷했다.
절망에 빠진 주인공 앞에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그를 구해주는 이야기.
절망 속의 영웅. 그림 속 영웅은, 어쩌면 내가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어린 나는 믿고 싶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그런 영웅이 나타날 거라고.

그렇게 나는, 하얀 종이 위에서라도 희망을 그려야만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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