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4 마지막까지 쥐고 간 열쇠

너의 청춘은 불같았고 우리 추억에는 화상만 남겼다

by 구작


김은 나고 자란 고향에서 300km 떨어진 지역으로 대학을 갔다

생전 처음 발 딛은 동네였고 같은 도에서도 그 지역에 가본 사람이 드물 정도인 작은 동네였다

그 곳에 대학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려운 모습이었지만

되려 서울에서도 오는 학생이 있었다

물론 수도권 대학에 갈 실력이 안 됐기에 떠밀려 온 이들이었다

성은 그렇게 거름 냄새 나는 들판에 선 그 학교에 온 서울 아가씨였다

김은 고향과 어울리지 않게 미술 전공이었고

성은 서울 출신 티가 나는 경영학도였다

김은 고향을 떠나면서 농사와 자연, 부모... 삶의 멍에들을 떨쳐버렸다

그래서 더 절실히 붓을 잡았다


성은 제법 사는 집의 막내딸이었지만 집을 거부해 부모가 원하는 삶과 반대로 막살았다

둘은 음악 동아리에서 만났고

A 손에 이끌려온 성은 구석에서 도끼눈으로 경계하다

순박하게 웃는 김을 눈여겨 보고 봄 축제에 그 앞에서 소주 나발을 불어 그를 가질 수 있었다


김은 성에게 마음을 뺏긴 것은 아니었다

성이 김을 가졌지 김이 성에게 순순히 내어준 것은 아니었다

성은 소유욕이 강했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김은 성의 성격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기꺼이 수십만원 동아리 술값을 내는 성을 이길 수 없었다

김도 성의 돈에 스무살 청춘을 즐기고 싶었다

성이 담뱃값으로 쓰는 돈을 김은 눈물로 받아들고 대학행 기차에 올랐기 때문이다

돈맛은 고향의 냄새를 지웠다

그래서 더더욱 김은 성에게 못 이긴 채 붙었다

성은 명석하지는 않았지만 날카로웠다

성은 김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다

성은 아낌없이 김에게 주었다

사실 성은 돈과 마음을 아끼는 여자가 아니었다


마르지 않는 샘은 김에게도 지루함을 안겼다

학기말 고사를 치를 무렵 김은 시험을 핑계로 성을 멀리했다

시험에 신경 안 쓰던 성은 더욱 김에게 신경썼다

성은 김을 찾아 도서관을 들쑤셨고, 김의 친구들 자취방을 뒤졌다

김은 공부할 시간을 뺐겼고 1학기 학점은 굳이 성적표를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김이 학교 밖으로 나오자

성은 정문에 차를 대놓고 있었다

담배를 물고 있었고 손에는 양주가 들려있었다

양주는 찰랑였다

밤쯤 비워진 양주는 뒷자리에 두 남자에게 들어간 듯 했다

성은 김에게 종강 기념으로 시내 나이트를 가자고 했다

김이 말이 없자 성은 끓는 가래를 도로에 뱉었다

누런 가래는 검은 아스팔트에 문신처럼 박혔다

김은 어지러웠다

그때 김은 성에게서 도망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김은 방학을 핑계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1학기 내내 기억에서 지워낸 산과 들, 냇가를 돌며 그림을 그리고 소주를 마셨다

핸드폰이 울려도 받지 않고 메시지가 와도 읽지 않았다

메시지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칼이 날라오는 듯 하더니 한달이 지나자 문자에서 피가 베어나왔다

그래도 김은 성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개강을 2주 앞두고 김은 재수할 결심을 세웠다


방을 빼기 위해 자취방을 갔다

아침에 나섰으나 도착하니 보랏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주택의 반지하를 차지하고 있던 자취방은 고즈넉했다

감색 알루미늄 문은 그새 더 바랬다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봤더니 망가져 있었다

크고 단단한 물체가 내리 찍은 것 같았다

그 상처에서 성이 보였다

김은 집을 돌아 창문으로 갔다

반지하지만 제법 큰 창이 있었다

창문은 한 뼘 가량 열려있었다

그 틈이 여름 습기를 잡았으려나...생각하며 김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동향으로 난 창문은 해질녘에 내부를 환하게 할 도리가 없었다

김은 창문을 넘어 티비장을 밟고 방에 착지했다

재털이와 책을 밟은 듯 몸이 기우뚱했다. 욕지기가 나왔다

열려진 창문이 제구실을 했는지 습하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했다. 여름치고 건조한 공기가 낯설었다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방 안쪽에는 침대가 있었고, 침대 맞은편 주방 가는 문쪽에 스위치가 있었다

티비장에서 스위치까지 벽을 더듬어 가는 길은 3미터 이내

천천히 움직이는데 속도 느린 소리들이 들린다

그때는 서늘이 아니라 싸늘했다

마침내 스위치에 손이 닿았다

그 사이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침대도 이불도 제법 보였다

스위치에 손을 댔으나 김은 켜지 못했다

"누...누구야?"

김의 목소리는 긴장했다

굳어버린 손은 안간힘을 내 불을 켰다

부스스 이불이 세워지더니 검은 형체가 드러났다

성이다

"왔냐?"

성의 목소리는 더 건조해졌다. 갈라진 목소리가 길게 뻗쳐 김의 목을 죄는 것 같았다

"너 왜 전화 안 받았어?"

-미안

"도둑도 아니고 왜 밤 늦게 들어와?"

-...

성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넌 내가 싫니?

난 너 사랑한다는 거 거짓말 아니었어

넌 내가 왜 싫어?"

성의 질문은 간절했지만 김은 말이 안 나왔다

사실 김은 성이 싫은 이유를 몰랐다. 어렴풋이 싫은 이유 수백개가 떠올랐지만 하나를 짚어내지 못했다

"나 갈게. 걱정마 이제 연락 안 해."

성은 정말 갔다

김은 잠시 멍하니 방바닥에 박혀있다가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김은 자퇴를 했다

가을에는 공부를 했고 겨울에는 또 다른 대학 면접을 봤다

새로운 봄이 오고 김은 새로운 학교, 친구들과 어울렸다

간간히 성에 대한 소식을 친구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여전히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다녔고 부모를 피해 다녔다

김은 1학기를 마치고 군대를 갔다


다시 새로운 봄을 보내고 보랏빛 노을이 배웅하는 여름 즈음

김은 까까머리를 하고 휴가를 나왔다

서울에서 그 대학 친구를 만났다

술이 한배 돌자 친구는 말했다

"성 얘기 들었어?"

-???

"아무도 얘기 안 했어? 너 놀랄까봐 그랬나보네...

지난 달에 시내로 차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 나서 안타깝게 됐어"


김은 그날밤 먹은 술보다 더 많이 눈물을 쏟아냈다

제대 후 복학까지 남은 기간에 김은 서울에서 알바를 했다

퇴근길에 보랏빛 노을이 술집으로 인도하는 어느 날

김은 성이 생각났다

친구에게 전화를 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성은 남양주 납골당에 있었다

사진 몇 장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 사진이 마지막이었다

대학때 본 성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친구들이 놓고 갔는지 편지가 몇 있었다

성이 좋아하던 시계와 목걸이도 보였다

그 사이 열쇠가 하나 있었다

낯익었다

...감색 문에 맞는 열쇠였다

김이 납골당을 나오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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