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5 그날 그리고 그 냄새

하늘에 계신 당신께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by 구작


그해 여름은 잔혹하게 더웠다

군인에게는 더 지옥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직업군인이었다

7월말 단비 같은 휴가를 얻었다

나는 천국행 급속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녹음은 푸르렀고 서울 가는 길은 가벼웠다

서울에 도착하니 콘크리트 빌딩도, 회색 직장인들 얼굴도 모두 아름다워보였다


3박4일. 내게 주어진 자유시간

그 시간을 난 시원한 맥주와 단짠단짠 '사회맛' 안주들로 채웠다

그 맛을 더 배가해줄 친구들도 물론 함께했다

달콤한 시간은 여름의 밤처럼 짧았다


마지막 날 다시 군복을 꺼내입고 역으로 향했다

체온을 넘어선 여름날씨에 군복은 땀으로 세탁됐고 땀냄새는 내 처지를 더 초라하게 만들어줬다

자리를 찾아 털썩 앉았다. 의자가 흔들렸다

옆에는 이상하리만큼 얼굴이 하얀 여학생이 책을 읽고 있었다

여학생은 내가 옆에 앉아도 곁눈질도 안 한채 계속 책을 봤다

군복, 땀냄새, 술냄새...내 모든 것을 그녀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술냄새를 떨치려 지나가는 카트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아저씨는 묻지도 않고 두 잔을 건넸다

옆자리 여학생도 내 일행인 줄 알았나보다

그때 나는 기분이 잠깐 좋았다

어쩔 수 없이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아저씨께서 두 잔을 주시네요."

-"아.. 안 주셔도 되는데... 잘 먹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녀는 귀대하는 군인 마음을 미치게 하는 눈웃음만 남긴채 다시 책으로 눈을 향했다

기차는 말없이 두시간 여 다시 달렸다


내려야했다

그녀는 계속 책을 보고 있었다

하얀 얼굴은 이제 눈에 익어 벚꽃색으로 보였다

내려야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야했다

역이 보이고 나는 일어서야했다

후회할 것 같아 주머니에 있던 담배곽의 귀퉁이를 찢어 부대번호를 적었다

"제가 있는 곳입니다. 다시 뵙고 싶습니다"

여자는 빤히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 얼굴에게서 어떠한 메시지도 읽을 수 없었다

등으로 시원한 땀 한 줄기가 흘렀다




지대가 높았던 부대는 일찍 겨울을 맞았다

월동준비를 위해 막사 지붕에 올라 이곳저곳 손보고 있었다

행정병이 아래에서 고래고래 소리친다

"어떤 여자가 술 취해서 부사관님을 찾습니다!"


그녀는 내게 많은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자기에게 왜 번호를 줬는지

왜 자기 의사는 묻지도 않고 번호를 줬는지

왜 군인이면서 번호를 줬는지

따지듯 물었다

그리고 자기 번호를 남기고 끊었다

그날 그녀는 경기도 작은 마을의 강가였다

죽은 친구 기일이라 납골당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 같이 간 친구 둘과 낮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들이 해마다 치르는 의식같은 행위였다

저세상에 있는 친구는 남자였고 대학동기였다

넷은 단짝으로 많은 걸 함께했다

남자는 사고로 두해 전에 죽었다

그녀는 남자를 사랑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랬으면 나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그 친구랑 많이 닮아서 번호를 버리지 않았어요"

친구 얘기를 마치고 내게 한 말이었다

그날 당신 땀냄새가 싫지 않았어요

그 친구는 여자 셋하고 친하다 보니까 궂은일을 다 해줬어요

우리 같이 하자, 우리가 하겠다해도

그 친구는 항상 뛰어다니면서 일을 처리했어요

우린 그 친구에게서 성실한, 착한 땀냄새를 배웠어요

당신이 앉았을 때 그 땀냄새가 떠올랐어요


나는 일년 뒤 제대를 하고 그녀와 3년 더 사귀었다

그동안 4년 내내 나는 새로운 멤버가 돼 그녀들과 그날에는 그를 찾았다

유골함 옆에는 그들 넷이 함께한 사진이 있었다

그 옆에는 그녀가 서있었다

그녀는 그의 왼쪽에 있었고 오른쪽에는 친구 둘이 또 있었다

그의 고개가 약간 그녀 쪽을 향했다고 생각하는 건 내 질투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문상이 끝나면 우린 낮술을 마셨다

모든 게 똑같이 이어졌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동네에 숙박을 잡고 늦게까지 술을 먹는다는 것

낮술이 밤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밤술을 먹다 술을 깨러 그녀와 나와 물가에 앉았다

"그 친구가 자주 생각나?"

-아니 그렇지는 않아. 모두 그럴 거야. 어쩌면 우린 그게 미안해서 오늘 더 술을 많이 먹는 것을 수도 있어

"그 친구도 이해할 거야"

-아마 그 친구가 우리 중 하나라면 우리처럼 덜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걔는 그런 애였여

그녀 눈은 달이 비친 강물보다 더 흔들렸다

그날 난 우리의 애인 관계를 청산할 때라고 결단내렸다


그로부터 또 4년이 지난 지금도 난 그녀 옆에 있다

여전히 땀냄새와 술냄새를 풍기며 옆을 지킨다

그녀는 여전히 하얗다

여전히 벚꽃처럼 예쁘다

그리고 그녀처럼 하얗고 예쁜,

군대에서 검게 그을린 내 피부를 다행히 물려받지 않은

딸이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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