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자주 가는 서점에서 읽을 책을 둘러보다 나오는 길에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나를 부른 사람은 그였다. 그는 내게 번호를 물어봤다. 하지만 나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그냥 왠지 나한테만 물어보는 건 아닐 것 같아서. 나쁜 사람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그 날은 아무 일 없이 헤어졌다.
며칠 후 그 서점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저 사람도 여기 자주오나? 오늘도 또 번호 물어보려나? 그를 의식하지 않은 척하며 책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봐요"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치다.
"오늘은 왜 번호 안 물어봐요?"
"지난번에 안 주신다고 하셔서..."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쪽 번호 알려주세요"
나는 핸드폰을 내밀었고 그는 더듬더듬 번호를 눌러서 내게 넘겨줬다
"근데 왜 갑자기..."
"그냥 뭐 하는 사람일지 궁금해졌어요. 연락할게요"
새침하게 대답을 하고 서점을 나왔다. 사실 아무렇지 않은 듯 톡톡 쏘는 말투로 말하고 나왔지만, 그때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나한테 번호 물어본 사람은 있어도 내가 먼저 물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그와 주말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돼지국밥. 그래도 첫 만남인데 왜 돼지국밥이냐고? 나는 고향이 밀양이다. 어렸을 적 아빠와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가면 메뉴는 항상 돼지국밥이었다. 얼마나 지긋지긋했던지 돼지국밥은 내가 밀양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욕하면서 정들었던 걸까 자연스럽게 돼지국밥은 내게 소울푸드 같은 음식이 됐다. 서울로 올라오고서도 종종 돼지국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경상도 사람인 내게는 서울의 밍밍한 그 맛이 그다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마 지나가는 말로 했었던 것 같은데 그는 그걸 기억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경상도식으로 돼지국밥 잘하는 집을 리스트로 가져왔다. 해맑은 미소와 함께. 생각보다 귀엽네.
나쁘지 않은 돼지국밥이었다. 서울에 있는 돼지국밥집들은 부산 할매니 밀양 원조니 이름만 번지르르하지 맹탕들이었는데 이 곳은 조금 달랐다. 여전히 아빠와 함께 먹던 아리랑 시장 돼지국밥 맛은 못 따라오지만. 기왕 출발을 돼지국밥으로 했는데 점잔 떠는 커피 대신 시원하게 낮술이나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돼지국밥 후 맥주 조합이 이리도 괜찮은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면 그냥 기분 좋은 낮술이라 그랬을까. 얘기가 무르익어가기 때문인지 우리가 점점 취해가기 때문인지 서로의 말에 웃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서로 10문 10답을 하자고 했다. 정말 궁금한데 체면 때문이든 초면 이어서든 못 물어봤던 것들을 물어보자고. 그는 그러자고 했다.
"좋아 그럼 나부터 시작할게. 내 첫 질문은 이거야. 나처럼 번호 물어본 사람이 몇 명이야?"
10문 10답은 갑자기 든 아이디어였는데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 서로 민감할 수 있는 부분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때로는 시시한 질문도 오고 갔지만 진지하게 9개의 대답을 하는 그를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내가 마지막 질문을 할 차례였다.
"근데 우리 첫 키스는 언제 해?"
그는 답했다.
"지금"
이 사람이 미쳤나. 아니 내가 미쳤나.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한 거지. 어쨌든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대낮에 짧게 입을 맞췄다. 첫 키스를 하고 나서 그는 무언가 끄적이더니 내게 계산서를 들이밀었다.
제품명 첫 키스. 수량 1. 단가 811만 원. 청구금액 총 811만 원.
한 분만을 위한 커스텀 메이드 제품으로 교환 및 환불이 되지 않는 상품입니다.
"뭐야 이게"
계산서라니 갑작스러운 첫 키스보다도 더 황당했다. 이런 식으로 첫 키스를 하는 거도 처음이지만 첫 키스 후 청구서를 받는 건 더더욱 처음이었다. 게다가 가격은 왜 또 811만 원이야?
"오늘 첫 키스 값이야. 할부로 해줄 테니까 앞으로 착실히 갚아"
"캐릭터 이상하게 잡으셨네. 좋아. 근데 왜 811만 원인데?"
"그냥. 오늘 8월 11일이더라고"
"뭐야 그럼 이거 돈으로 갚아? 나 811만 원 없는데?"
"아니, 한 번 데이트할 때마다 100만 원씩 까줄게. 너 못해도 나랑 8번은 만나야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건 그냥 미친놈이었지만, 그날은 술에 기분 좋게 취했는지 그런 그의 모습마저 귀여워 보였다. 아마 그때 내가 취한 건 술뿐만은 아니었나 봐.
그 후로도 그를 몇 번 만났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만나면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811만 원을 완납하지는 못했다. 서로 일이 너무 바빴다는 그 흔한 핑계 때문에. 이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그날은 그저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리라. 오늘 인터넷 기사를 보다 보니 이런 글이 있었다.
"노동소득' 43세에 정점, 연 2천896만원…65세는 811만원"
811만 원. 오랜만이네.
* 이 글은 Random Restaurant 기획 글 입니다.
Random Restaurant, Weekly cuisine 프로젝트란?
그 주에 인기가 있었던 단어들을 무작위로 조합한 제시어를 공통으로 활용하여 산출물을 만들고 주 1회씩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https://brunch.co.kr/@kkw1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