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멧별 May 29. 2021

그대

내 어깨 바람같이

나는 시외버스 터미널 입구에 섰다. 살고 있는 도시 밖으로 나갈 참이다. 른 새벽이라 어둡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을 것 다. 몇  안 되는 돈에서 일부를 꺼내 승차표를 산다. 국도를 따라 한 시간을 갈 것이다. 거기에는 오래된 절이 있다. 버스는 거의 비었다. 평일 아침 관광지로 떠나는 사람은 없나 보다. 거기도 지금 버스처럼 비어있을 것이다.


지나가는 가로수에 시선을 고정시키려 애쓴다. 앞에서 봤다면 눈동자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재빨리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반복된 동작일 것이다. 버스에는 라디오 방송이 나온다. 어디가 막히고 어디서 차가 전복되고 따위의 내용이다. 눈을 감는다. 대 이름을 떠올린다. 심장 조여 온다. 심장에는 과연 그런 신경이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다 잠이 든다.


관광지임을 알리듯 매표소 골적으로  상업적이다. 부모가 표사는 몇 초 간에도 따라온 아이들을 유혹하려고 갖가지 싸구려 장난감들을 주렁주렁 달아 놨다. 푼 남지 않은 돈에서 일부를 입장권을 산다. 장난감 조직원일 수도 있는 검표원 펀치쯤 뚫리게 구멍을 다. 종이 조각이 떨어져 나가 바닥 어질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표에 난 중간한 처가 일종의 통과의례다. 


그리곤 승과 저승의 경계처럼 놓인 기와 대문 문지방을 훌쩍 넘어 든다. 발길을 옮긴다. 방향이나 목표와  움직임이다. 가면 갈수록 상업성과는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럴 리 없지만 사위가 적막해진 듯하다. 시야가 좁아지고 호흡이 잦아든다. 그대를 만났던 그날 땠나.


그날은 사람이 많았다. 우린 늘과 같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만나  표를 두 장 사고 같은 버스에 올라 같은 국도를 달려 같은 대문을 지나 이 절에 왔다. 그대는 노란 플레어 원피스 치마를 입고 날렵한 밀짚모자를 썼다. 하얀색 운동화에 리본으로 끈을 맸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가 어깨에 걸쳐져 걸을 때마다 경쾌하게 흔들렸다. 그때 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필름이 되고 싶다.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진으로 남고 싶다.


우리는 절을 향해 난 오솔길을 따라 함께 걸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보행하는 모습, '함께 걷다'라는 말을 사람들은 어떤 어감으로 느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세상의 모든 단어에 담아 세상에 하나뿐인 목소리로 세상에 하나뿐인 그대에게 들려준다는 뜻으로 느껴다. 그렇게 그 길 위에는 우리 밖에 없었고,  그 길이 상은 소풍 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하더라도 아마 결국엔 우리 밖에 없었으리라.


그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분명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젊었고 는 낡은 운동화 위에 때 묻은 청바지와 늘어진 티셔츠를 걸치고 백팩을 메고 있었다. 빛나는 그대와 추래한 나는 어울리지 않았다. 남들이 힐끔거릴 만큼 어색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서로 싫지 않았다.


우리는 그 절에 속해있는 암자로 향했다. 길이 좁아질수록 인적은 드물고 주변은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졸졸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이내 작은 암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디딤돌 위에 가즈런히 벗어놓은 하얀 고무신 몇 켤레가 보였다. 멀리서 웅얼웅얼하는 듯 들리던  소리는 가까워질수록  느낌으로 다가다. 우리는 툇마루에 앉아 목탁소리에 맞춘 반야심경을 들었다. 돌로 쌓은 약수터에서 하늘색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도 마셨다. 그대가 참 좋다고 하길래 나도 그렇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마주 잡았다가, 깍지도 꼈다가, 서로 번갈아 손가락만 잡았다가, 앞뒤로 흔들었다가 하면서 산길을 내려왔다. 암자의 스님들이 했던 구도적 합장과는 다른 구애적 합장을 다. 절 입구에는 식당이 즐비했다. 파전에 막걸리를 먹었고 그대의 난처해하는 트림에 우린 웃었다. 발간 볼과 흑백의 눈,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앞에 두고 나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그대는 말이 많아져갔다.


서로의 탄생에서 지금까지를 만담처럼 주거니 받거니 했다.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아갈 때마다 계단에 한 칸씩 올라선 기분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들도 왠지 모르게 술술 털어놨다. 아팠던 일을 얘기할 때는 같이 울었고, 행복했던 일을 얘기할 때는 함께 웃었다. 술기운이 올라 점점 망가져가는 서로의 얼굴이 이상하게 점점 더 아름다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 어깨에 기댄 그대는 바람같은 가벼움과 왠지 모를 버거움을 내게 줬다. 나지금부터 뭔가 그대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해야 하고,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덜컹하는 느낌잠을 깬다.  이름으로 된 터미널에 도착한 버스는 마지막 손님인 내가 빠져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버스를 내려 절을 향해 걷는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앞에 선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까맣게 잊고 서있다. 몇십 년 전의 일이 어제 같고 다시 내일 같다. 그때의 그대도, 그때의 나, 이제 세상 없다.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사천왕이 그 존재를 안다는 듯 의기양양하다. 제는 오지 않을 그들을. 바람이 인다.

카제타치누. 사운도토랏쿠.






이전 15화 생존자와 완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