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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딸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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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랑관장 Jul 13. 2018

시발놈들

차마 뱉을 수 없는 슬픔을 경유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그 순간을 기록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순간 이냐 하면.. 아빠가 광안리 앞바다에서 터지는 폭죽을 향해 ‘야이 시발놈들아’라고 외쳤던 순간을 말이다.


우리 가족, 그러니까 양친 그리고 나와 동생이 광안리 수변공원에서 지는 해를 뒤로 신문지를 펴놓고 회 한 접시를 먹은 날이었다. 나는 전날 숙취 때문에 술도 없이 회로 배를 채웠다. 뒤늦게 합류한 외삼촌과 아빠는 앉은자리에서 남은 회를 안주 삼아 소주 서너 병을 단숨에 마셨고 그리하여 아빠는 급히 취하는 듯했다. 부쩍 신경질적인 동생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도 지는 해가 따갑다며 미간에 내천자를 그리고 앉아 회를 먹는 둥 마는 둥 하였고 모친은 높이 상승하는 혈압 때문인지 외삼촌과 아빠의 대화에 추임새만 넣을 뿐 딱히 말이 없었다.


공원에는 색소폰을 동원한 아마추어 밴드가 연신 트롯 가요를 연주하였고 흥에 겨운 등산복 차림의 아주머니가 하나둘 일어나 엇박자로 리듬을 탔다. 삼삼오오 모인 아줌마 아저씨 무리의 행동을 관찰하며 동생에게 어쭙잖은 농담을 건네기를 한 시간여, 컨디션 난조를 표명한 엄마에 의해 자연스레 자리가 급작 정리되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 자리가 즐겁지 않았다. 시끄러웠고 해가 넘어가기도 전해 취해버린 사람들의 들뜬 고성, 성이 난 듯 안 난 듯 울렁거리는 부산 사투리까지 더해지니 얼른 자리를 정리하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수변공원에서 광안리 우리 집까지는 천천히 걸어 족히 이삼십 분이면 충분한 거리. 동생과 나는 잰걸음으로 집을 향하고 양친은 어쩐 일인지 걸음이 느려 우리와 계속 거리가 유지되었다. 거리가 줄고 멀어지기를 두어 차례 반복하고 집 앞 맥주집 앞에 당도했을 때, 아빠는 작정했다는 듯 한잔 더 하고 들어가자 하였다. 해는 지고 이미 광안리 앞바다는 현란해질 대로 현란해지는 밤이었다. 명절을 앞둔 들뜬 해변 테라스에 가족, 연인이 천지였다.


집으로 오는 중 부모님과 거리가 좁혀졌을 때 간간히 둘의 대화를 훔쳤는데 주로 아빠의 목소리만 들렸다.‘평생 지들을 위해서 살았는데 부모 버리고 저렇게 먼저 간다’며 서운해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오늘 긴장의 끈을 늦춰서는 안 되겠다 다짐함과 동시에 무디다 무딘 동생도 이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우리도 맥주집 테라스 한편에 자리했다. 치킨 한 마리를 시키는데도 ‘왜 반마리는 없느냐’ ‘왜 치킨이 이리 비싸냐’는 식의 술 투정은 계속되었다. 행여 아빠의 말이 서빙하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들릴까 나는 연신 겸언쩍은 미소를 보이며 상냥함을 잃지 않았다. 아빠는 기분이 좋은 듯 나빠 보였고 나쁜 듯 좋아 보였다. 그리고 넋두리가 시작되었다.


아빠는 슬프다고 했다. 그리고 부산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당신은 상처를 너무 많이 입었다고 했다. 차마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다고 했고 입으로 뱉을 수가 없어 글로 쓰고 있다 했다. 제주로 간다고 하기도 했고 강원도로 간다고도 했다. 그러다 이민을 가겠다고도 했다. 언제는 엄마와 함께 떠날 거 같이 하다가 언제는 우리더러 엄마를 잘 보살피라고 했다. 엄마는 당신이 없어야 더 편히 살 수 있을 거라도 했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고 평생직장생활을 했는데 물리적으로 떠나야만 그 상처가 치유되는 공간이 된 건가 싶어 문제가 가볍지 않다 여겼다. 그런 아빠의 말을 엄마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사춘기가 왔냐며 냉소했다. 하지만 분명 엄마의 혈압은 상승 중이었다.


그러던 중 폭죽이 터졌고 옆 테이블 꼬꼬마가 환호 섞인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아빠가 소리쳤다. “야이 시발놈들아!!!!!!!!!!!!!!!" 쌍시옷 발음이 어려운 아빠의 중저음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시끄럽던 맥주집이 일순 침묵했다. 우리는 얼음이 되었다.


그 침묵을 깨는 것 역시 아빠였다.”폭죽 터트리지 말랬지!!!!!!!!!!!! “ 그제야 우리는 안도했다. 행여 아빠의 욕지거리가 아이를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의구심이 해소되었기 때문이었다. 폭죽에 화가 난 건지 우리에게 화가 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아빠는 끝내 당신이 슬픈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충격이었다. 술이 얼마간 취해도 아빠의 취중 푸념을 들어본 일이 없다. 그리고 다음날 이른 아침 아빠는 벌초를 하러 간다며 하루 종일 집을 비웠고 나는 그날 저녁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 아빠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빠는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서울 가는 동생과 나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가족사진 셀카를 몇 장 찍었고 포옹을 두어 차례 했다. 그리고 아빠는 몇 번이고 셀카를 보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서울에 도착한 그다음 날, 아빠는 당신 형제들을 만나고 또 얼큰하게 취해 나에게 전화하여 연신 슬픔을 고했다. 확인해보니 동생도 같은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아빠가 슬프다고 하니 눈에 물부터 고였다. 아빠의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주변 지인의 말대로 퇴임하고 찾아오는 끝 모를 외로움이 원인인가. 소위 갱년기 우울증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엄마는 아빠를 신경 써달라고 했다. 신경을 쓴다는 것은 전화 몇 통을 늘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즘 신경을 좀 쓰고 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나는 아빠의 수다가 반갑고 고맙다.


차마 입으로 뱉을 수 없는 슬픔이라 글로 쓰고 있다는 아빠..
가족이라고 해서 어찌 그 아픔을 다 알 수 있겠나..
그저 더 자주 수다를 떠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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