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 엄마와 아들…. 2인이 함께 PT를 받으면 할인 혜택이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유리하다. 딸과 운동하는 엄마를 보면 부럽다. 누가 봐도 모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닮은 눈매에 비슷한 운동복을 입고 와서, 서로 자세를 봐주며 칭찬하고 격려한다. 보통은 딸이 엄마보다 능숙하고 안정적이다. 딸들은 스마트 기기 사용법을 설명해 줄 때처럼 당당하고 엄마들은 다소곳이 귀를 기울인다.
물론 평화가 늘 지속되는 건 아니다. 서로 자세를 지적하다가 한쪽이 벌컥 화를 내기도 하고 누가 맞는지 확인해 보자며 트레이너에게 달려가기도 하고, 급기야 체육관 끝에서 끝으로 떨어져 운동하다가 다시는 엄마랑(딸이랑) 같이 운동 안 한다며 한쪽이 먼저 휑하니 나가는 일도 있다. 가족끼리 무언가를 함께 하거나 가르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공부, 운전은 당연하고 운동도.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하는 과제를 보여 주면 딸은 재밌을 것 같다며, 자기도 엄마 수업을 들어보고 싶다고 하지만,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딸의 작업에 대해서 몇 마디 했다가 큰 싸움으로 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족이란 적당한 거리(물리적, 심리적 거리 모두)를 두고 서로를 믿고 응원하는 것 외에는 하지 말아야 한다. 자녀와 유사한 분야에서 일하는 부모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 ‘적당한 거리두기’가 참 쉽지 않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면 우리나라만의 특징이 아닌 것 같고, 영화 <사도>를 보면 21세기 만의 문제도 아닌 것 같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닐 페리의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아들에게 강요하면서 이 모든 것이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는 천재인 줄 알았던 늦둥이 아들이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무술과 그림 그리기에만 치중하자 아버지 영조는 미움을 품는다. 아들을 미치광이로 만들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조차 영조는 “그게 다 너 제대로 된 왕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노라 얘기한다.
이들은 각각 260여 년 전, 70여 년 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고 게다가 <사도>는 궁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이지만, 자식과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자녀를 위한 것이라 착각하는 부모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재현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유난스러운 입시경쟁 때문에 안 그래도 어려운 부모와 자식 관계는 더 밀착된다.
우리나라에서 입시 준비는 부모와 수험생의 팀 프로젝트다. 부모는 학원 일정을 관리해 주는 매니저로, 늦은 시간 귀가를 돕는 운전사로, 사교육비를 지원해야 하는 후원자로 자녀와 함께 달린다. 그 과정에서 부모에게서 떨어져 스스로 서겠다는 몸부림의 시기인 사춘기에도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다.
체육관에서 투덕거리던 모녀를 보며 시작된 상념이 길어졌다. 내 아이는 이제 다 커서 나를 떠났지만 내 앞에는 항상 20대인 학생들이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수적이다. 처음엔 ‘적당한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그 거리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지금도 종종 헷갈린다. 그래서 <사도>나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영화를 볼 때마다 뜨끔 한다. 그런 영화가 계속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자식/제자와의 거리 두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