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치기

낫는 일

by 그믐

어린 묘목이 하나 자라고 있었다. 신은 가장 필요한 곳에 그것이 나게 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서 묘목은 어느새 왠만한 태풍에도 꺾이지 않을 만한 어른이 되었지만, 언제나 자신이 뿌리내린 터에 불만이 많았다. 그곳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어 다 타버릴 듯한 고통을 느끼는 날도 있었고, 세찬 비에 뼛 속까지 젖어드는 날도 있었으며, 휘어질 법한 강한 바람에 갈라지는 일도 적지 않았다. 뿌리가 썩을 뻔도 했고, 갓 틔운 싹이 제 삶을 꽃 피우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해야 했다. 나무는 아팠다. 동산 주인은 그 간 틈틈히 아픈 곳을 치료해 주거나, 나쁜 가지들을 정리해 주기도 했다. 사람들을 초대해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했고, 다른 좋은 나무들과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문객이 자신에 대해 떠들어대는 이야기도 우스웠고, 다른 나무들의 위로나 바람에 실려온 새들의 이야기들도 가짢았다. 묘목은 자신을 옮겨심지 아니하고, 그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하는 동산 주인이 치료를 앞세워 자신의 가지를 자르거나, 고통스러운 약을 주는 것이 싫었다. 다른 나무들보다 힘겹지만 살아낸 삶을 살아낸 것에 대한 교만이었다. 나무는 동산 주인이 자신을 내버려두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듯, 주인은 오랜 여행을 떠났다.


2년 가량의 세월이 지나 주인이 돌아왓을때, 나무는 더 슬픈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왜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원망하던 주인이 자리를 비운 동안, 나무는 살아남기 위하여 몸을 휘이고, 가지를 치고, 지나가는 새들이나, 장난끼 많은 방문객들에게 다치지 않기 위하여 못되지기도 해야 했다. 그리고 별이 까맣게 쏟아지던 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제멋대로 뻗은 가지는 흉했고, 베베 꼬인 몸뚱아리와, 이리저리 뻗은 기생식물들, 썩어 곪아가는 옹이들. 돌아와서 나무를 발견한 동산 주인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주인의 안쓰러운 표정이 화가났다. 자신을 이 모양이 되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리고 주인은 마음이 가는 만큼 나무를 신경 썼다. 가지를 자르려했고, 아픈 곳을 쓰다듬었다. 묘목은 주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인을 기다렸지만 막상 다시 만났을 때엔, 자신을 안쓰러워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주인이 싫었다. 어리석게도 그 아픔이 치유의 과정인지를 몰랐다. 약은 자신을 더 병들게 하는 것 같았고, 손길은 종기를 더 곪게만 하는 것 같았다. 방문객들의 시선이 싫었고, 더 큰 외로움 속으로 빠져들었다. 차라리 자신을 뽑아들어 없애버리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별이나 달에게 못난 모습이 들키는 것조차 속이 상했으니.


그러던 어느 따스한 봄날, 한 소녀가 찾아왔다. 소녀의 눈동자엔, 안쓰러운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나무다. 조금 아파보이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 단비같은 위로였다. 그리고 나무는 깨달았다. 교만하려고 열심히 견뎌내었던게 아니었는데. 다른 그 누구도 얼마나 힘겹게 살아내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외로움이 경솔이 되었다. 더 큰 외로움으로 빠져들수록, 더 많은 다른 이들을 경멸했다. 못난 모습에 대한 자각은 자신감을 앗아갔다, 대신. 이전엔 갖은 적이 없던 배려심의 싹을 틔웠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사랑이 가장 큰 치료였음을 알았다. 깨달음은 스스로 썩은 뿌리를 잘랐다. 잘못 뻗은 가지들을 포기했고, 딱딱하게 휜 몸뚱아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산 주인은 생각했다. 이젠, 혼자서도 잘 크겠구나 하고. 나는 그저 더운 여름, 그늘을 빌리고 그 아래서 쉬어가면 되겠구나 하고. 옹이는 떨어져 나갔고, 기생하던 덩쿨이나 잡초들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무는 여전히 나무가 되어가는 묘목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어떤 볕이 들지라도, 어떤 비바람이 불지라도 잘 살아갈 것이라는 예감을 갖는다. 언젠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가지고 지우고 틔우는 일을 반복할 즈음엔, 살아내려는 고통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바람에 실려온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자신을 보러온 사람들의 눈동자에 무엇이 담겨있든, 그 눈빛을 아끼게 될 것이다. 다른 나무들과 뿌리를 꼭 잡고 온기를 나눌 것이다. 먼저 사랑할 것이고, 사랑받을 것이다. 그리고 꼭 있어야할 곳에 가장 좋은 나무로 남을 것이다. 살아가는 기쁨과 살아가는 아픔을 나누며 행복할 것이다.


201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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