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6월 28일 토요일 오후 2시 5분, 나는 엄마가 되었다. 체중 2.55kg, 신장 47cm, 두위 32cm, 흉위 30cm의 작은 모습으로 34주 3일 만에 이른둥이로 태어난 아들은,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2주 동안 보살핌을 받고 집으로 왔다.
처음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들을 보았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작은 체구로 코에는 산소호흡기, 가슴에는 심박수체크기, 눈에는 안대를 하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안대는 황달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임신초기에는 유산기로 병원에서 보내는 날이 많았고, 6개월부터는 조산기로 자궁수축억제제와 태아 폐 성숙 주사를 맞으며 출산 때까지 병원생활을 했다. 그렇게 우리 모자는 고통과 인내의 날들을 함께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아들을 처음 안았을 때의 감격은 강렬했다. 내 몸의 일부였으나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었던 생명이, 완벽한 개체로 내 품에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손을 잡아주려고 하자 아들은 위로라도 하듯 온 힘을 모아 내 검지를 쥐었다.
생후 2개월이 되었을 때 아들의 체중은 6kg이 되었다. 신장 또한 60cm로 자라 한국 소아발육표준치에 육박했다. 트림을 하기가 바쁘게 먹고 또 먹은 결과였다. 적정량을 고수하려고 각오를 단단히 하기도 했지만, 원하는 만큼 먹지 못하면 충족이 될 때까지 울었다.
우는소리와 부르는 소리도 달랐다. 배가 고플 때에는 ‘응애, 응애’ 했고, 부를 때에는 “띠에, 띠에” 했다. 둘 중 어떤 소리를 하든 바로 달려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자지러지게 울고, 울면 금방 목이 쉬었다. 또한 잠시도 품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우량아가 된 아들은 백일이 지나면서부터 장난감보다 책을 좋아했다. 동화책을 낱장으로 만들어 곳곳에 붙여놓으면 읽듯이 옹알이를 했다. 특히 딕 브루너(Dick Bruna)의 그림책을 보면 발버둥을 치면서 좋아했다. 엄마토끼가 아기토끼의 손을 잡고 포도바구니를 들고 있는 그림을 볼 때에는 짝짜꿍을 하면서 ‘까르르까르르’ 웃었다. 그러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여전했다. 잠시라도 보이지 않으면 ‘띠에, 띠에’ 부르고, 달려가지 않으면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의자에 아들을 태워 눈에 보이는 곳에 두어야 했다.
돌잡이에서 아들은 돈과 붓, 실을 순서대로 잡았다. 여기까지가 아들이 아빠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한 전부였다. 돌잔치를 끝으로 나는 남편과 헤어졌고 아들에게는 아빠가, 나에게는 남편이 영원히 사라졌다.
아들은 말을 하면서부터 책을 더욱 좋아했다.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쉼 없이 ‘뭐야, 뭐야?’하며 물었다. 자음과 모음을 번갈아 들고 오기도 하고, 손에 잡히는 것마다 질문을 쏟아냈다. 나는 아들의 손과 발길이 닿는 곳마다 책을 늘어놓았다. 장난감이 들어있는 바구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중 반복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책은 아들을 위해 준비한 책상의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책꽂이의 책들이 책장으로 옮겨져 채워질 무렵, 아들은 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질문은 더욱 늘었다. 나는 물어보는 글씨들을 스케치북에 써서 서너 번씩 읽어주었다. 아들은 내가 읽어준 글씨를 반복적으로 웅얼거리다가 스케치북에 써서 보여주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듯 글씨를 익힌 덕분에 아들의 글씨체는 지금도 예술적으로 엉망이다.
부모는 자녀가 또래보다 이른 시기에 말문이 트이거나 글을 읽으면 천재인 줄 착각한다더니 나 역시 그랬다. 제대로 가르친 적 없는데 읽고 쓰는 아들을 천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연필을 잡기에도 어설픈 시기에 매일 스케치북을 갈아치우며 글씨를 깨우친 아들을 천재라고 하는 것은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라고. 가르친 적 없는 부모는 있어도 익히지 않고 터득한 아이는 없다고.
‘엄마!’ 내가 그리움으로 헤일 수 없이 불렀던 이름을 이제는 아들이 나를 향해 부른다.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왈칵 대는 이름 ‘엄마’, 오랫동안 부르지 못한 그 이름을 불림으로 채워주는 아들이 대견하고 고맙다. 그런 아들을 보면서, 나는 어머니처럼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불러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 외로워도 나눌 수 없는 마음, 힘들어도 안길 수 없는 품, 원해도 꿈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좌절을 아들은 결코 모르게 하고 싶었다. 부르면 달려가고, 울면 달래주고, 힘들면 언제든지 품을 내어주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으로 주고 싶었다. 아들의 허락도 없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아들의 동의도 없이 엄마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아빠도 없는 가정에서 살게 했으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격증도 없는 엄마이기에 그렇게라도 해서 미안함을 덜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