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마냥 Nov 25. 2023

눈 내리는 날, 마음속 김장을 했다.

(김장하는 날)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온다. 좁은 골짜기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은 이겨낼 도리가 없다. 바람이 불어오는 골짜기 쪽으로 천막을 치는 것으로 대신한다. 언제나 늦가을이면 해내야 하는 시골살이의 행사였다. 겨우내 파 먹어야 했고, 자식들 김칫독이라도 채워줘야 해서다. 여름이 지나가던 계절, 5일장에서 종이봉지에 싼 씨앗을 텃밭에 뿌렸다. 혹시나 하여 왕겨로 습기증발을 막아야 했고, 암탉이 거느린 병아리의 급습을 막아야 했다.


더듬거리며 올라온 배추모를 가을이 오기까지 돌보며 비바람을 이겨내도록 봐줘야 했고, 산식구들의 급습을 막아줘야 했다. 서서히 배추가 몸집을 불려 갈 무렵이면 지프라기로 배추를 동여매 주었다. 골짜기 추위를 이겨내도록 다독여주며 기어이 초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언제나 당연히 해야 함은 겨울을 이겨내는 겨울식량이었기 때문이다. 통통하게 자란 배추를 뽑아 우물에 씻어 소금에 절였다. 

새벽부터 씻어낸 배추는 큰 소쿠리에 담겼고, 드디어 양념과 어우러지는 김장을 했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김치를 버무렸고 주고받는 소주잔은 김장의 백미였다. 이내 땅속에 묻힌 김칫독엔 김장이 들어찼다. 겨울을 이겨낸 김칫독에 갇혔던 김치맛은 잊을 수가 없었다. 얼음이 범벅된 김칫독을 열자 노란 고갱이는 보자마자 입맛이 돌아왔다. 하얀 쌀밥에 얹혀 아삭하게 씹히는 맛은 엄마의 맛이었고 고향의 맛이었다. 야, 그 맛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꿈속에서도 만날 수 없는 그 맛을 다시 찾을 수는 없을까?


시골에 자리를 잡고 그 맛을 찾아 나섰다. 땅을 파고 독을 묻어 김치를 감춰놨다. 한겨울이 지나고 만난 김치의 맛은 오래 전의 맛이 아니었다. 똑같은 김치이고 배추였지만 어머님의 김치맛은 찾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럴까? 왜 그 맛을 찾을 수가 없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던 그 맛은 어머님이 안 계시기에 어쩔 수 없는 맛이었다. 김칫독의 신비스러운 맛은 찾을 수 없었고, 김치 냉장고의 냉정한 김치맛으로 대신하고 말았다. 


세월은 성큼성큼 흘러 응달 속 김칫독은 잊혀갔다. 가까스로 김치의 명을 이어가는 가을 잔치가 이어지고 있다. 절임배추라는 절묘한 품목이 추가되어 한 시름을 놓은 가을, 아이들을 이리저리 불러 모았다. 가을을 마무리하는 이 행사라도 해야 마음이 편안해서다. 비록 부모님은 안 계시지만 오래 전의 그 기분을 찾고 싶어서다. 절임배추를 실어 나르고, 김치와 어우러지는 양념을 올해도 아내는 창조(?)해 냈다. 빙 둘러앉아 절임배추의 분장을 하는 모습은 오랜만에 만나는 정다운 풍경이다. 언제까지 김장잔치를 할 수 있을까?

세월은 변함없이 흘러갔고, 김장하는 풍경도 쉬이 변하고 있다. 즉석에서 만들어 파는 김치 축제가 진행 중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간다. 쉽게 밥도 해 먹지 않는 세월이다. 즉석 밥이 가득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반찬이 넘쳐난다. 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 시간이 없다며 쉬운 삶의 방법을 택하며 산다. 언제나 쉬이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사연들이 김장도 멀리하는 세월이 되었다. 언제까지 김장을 하러 아이들은 찾아 오려할까? 어머님의 김장독에 든 김장이 자취를 감추듯이, 김장하는 모습도 변하지 않을까? 


찬바람이 몰아치는 골짜기의 작은 집에 이야기가 오고 간다. 서둘러 찾아온 아이들이 웃음꽃이 피어난다. 쉽게 접할 수 있는 통닭 한 마리 배달되지 않는 골짜기의 삶이다. 온 세상의 삶이 차단된 듯한 골짜기의 삶이지만 아이들이 아직은 찾아오고, 이웃들이 말을 걸어주는 삶이다. 가끔 그림을 그리러 드나들고, 색소폰 연주회를 준비하는 마음이 바쁘기도 했다. 깊어가는 겨울 따라 마음이 서두르는 아침이다. 오늘따라 산등성이를 넘은 맑은 햇살이 더없이 반짝인다. 설레는 아침 햇살처럼 찾아온 겨울을 반갑게 맞이하며 살아야겠다. 찾아 올봄에 아름다운 자연의 신비함을 맞이하기 위해서.

매거진의 이전글 시골살이, 이런 맛에 살아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