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꽃이 필랑말랑.
오늘도 비가 온다. 비가 오면 괜한 부지런병이 발동하는 나는 9곳의 버스 정류장을 지나야 하는 약속 장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게다가 태풍이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에 걸맞은 세찬 비가 오고 있음에도 걷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살아야 속병이 생기지 않는다.
9곳의 버스 정류장 중 3곳은 화훼단지로 이루어져 있다.
주말이나 날 좋은 평일에는 화훼단지를 방문하는 손님들로 늘 왁자지껄하지만, 오늘처럼 비가 오는 한산한 평일 오전은 도로변에 판매용으로 전시된 꽃과 나무를 빗소리 곁들여 천천히 구경하기 딱 좋다.
작고 귀여운 다육이부터 선물용, 관상용으로 쓰이는 형형색색의 꽃, 정원수(庭園樹)와 다양한 크기의 화분들까지 식물과 관련된 모든 것이 이곳에 있다고 보면 된다.
아직까진 반팔이 활동하기 적합한 날씨여서 가을이 온 것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줄 맞춰 나와있는 국화 화분들을 보니 확실한 가을이라 느껴졌다.
패션계 다음으로 계절에 민감한 곳은 화훼계가 아닐까?
화훼단지에 전시되었던 벚나무와 튤립을 보며 봄이 왔음을 알 수 있었고, 이번 가을도 꽃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동그란 모양의 국화 화분을 보며 비로소 가을이 왔음을 실감했다.
봄이나 여름에는 계절에 피는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판매를 위해 전시되어 있지만, 이상하게 가을에는 꽃잎의 색만 다를 뿐 오직 국화만이 단지를 뒤덮고 있다. 지금은 만개하지 않았지만 곧 이곳은 파랗고, 빨갛고, 노랗고 하얀 가을의 국화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 국화들은 가을을 곁에 두고 오래 느끼고 싶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장소에서 꽃잎의 색마다 지닌 다양한 꽃말들을 곁들여 '가을'을 선물해주게 될 것이다.
국화의 단아함을 오래 보고 싶은데 갈수록 짧아지는 가을이 야속할 뿐이다.
"이것 봐. 걸으니까 좋은데?"
가방과 우산을 든 손에 휴대폰까지 꺼내어 사진을 찍느라 폰 액정이 빗방울로 젖어있지만 좋기만 하다.
하루에 한 번 기분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흔하지 않은 일인지 알게 되는 요즘이다.
"너... 설마 걸어왔어?"
"오? 어떻게 알았어?"
"너 바지... 뒤에 흙탕물 다 튀었어..."
친구가 너저분한 내 꼴을 어이없어하며 쳐다보았지만 더럽혀진 바지 따위로 속상해지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