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볼펜 상단에 한글로 색이름이 표기되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볼펜의 색을 물었다.

by 코알라

자수 수업을 하는 강의실에서 몇 정거장만 더 가면 내가 사랑하는 교보문고가 있다.

마침 올해 야심 차게 계획한 '필사'를 위해 예쁜 노트와 내 손에 착 감기는 펜을 사야 해서 핫트랙스를 아니 갈 수가 없긴 했다.(교보문고 바로 아래층에 핫트랙스가 있다.)

수업이 끝난 목요일 12시, 어찌 참새가 방앗간을 그저 지나치랴. 자연스럽게 집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의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교보문고를 가는 주된 목적은 '책 구경'이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한두 시간 책 구경을 하다 보면 허기가 밀려온다. 그래서 늘 책 다음으로 사랑하는 문구류까지 집중해서 구경하기엔 체력이 달린다. 늘 교보문고를 다녀가며 신상 문구류만 스치듯 대충 구경하다 이번엔 두 팔 걷어붙이고 여러 종류의 펜들이 밀집해 있는 '필기구'부터 향했다.


'시작해 볼까?'

나는 굵은 심을 좋아하지 않는다. 0.38mm, 내가 가장 사랑하는 펜심의 두께이다.

볼펜이든 수성펜이든 중성펜이든 중요하지 않다. 오직 0.38mm이면 된다.

사무용품 구입비용을 아끼지 않던 이전 회사 덕에 여러 종류의 펜을 써보며 알게 된 나의 취향이다.

브랜드별, 심의 굵기별로 나눠진 수가지의 펜들 사이에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몇 개의 검정펜을 집어 들고 진열장 하단에 조그맣게 붙여진 테스트용 하얀 용지에 간단한 글자를 써보았다.

우리나라, 우리나라, 우리나라, 우리나라...

펜의 질감을 테스트하기 위해 내가 쓰는 단어는 '우리나라'이다. 중학생 때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테스트 용지에 무의식적으로 내 이름을 써대다, 누군가 알아보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친구의 말에 바꿔 쓰기 시작한 단어가 '우리나라'였다.




두 브랜드의 중성펜을 들고 이래저래 고민하던 찰나 아까부터 필기구 코너를 벗어나지 않고 한참을 왔다 갔다 하시던 할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저기... 이거 세 개 모두 검은색 맞지요?"

"네? 아.. 네....... 아니요!! 아니에요! 잠시만요."

할아버지는 양손에 일제 중성펜 세 개를 들고 계셨다. 얼핏 보니 검은색이어서 대답을 하다가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 색의 차이가 느껴져 황급히 대답을 바꿨다.


"잠깐만요 그 펜들 저 줘보세요."

"다 검은색 아냐?"

대충 그립감만 테스트해 보고 검은색인 줄 알고 사온 펜이 집에 와서 보니 네이비였어도 나는 그냥 썼겠지만, 꼭 검정이어야만 할 듯한 할아버지의 단호한 말투에서 나는 건성일 수 없었다.

생전 잘 보지 않던 펜 상단에 표기되어 있을 색이름을 찾아보았다. 하나는 Black였고, 하나는 Brown, 나머지 하나는 Navy였다.


"이거 하나만 검은색이고 나머지는 다 다른 색이에요."

"아, 그래?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이는데... 이걸 어쩌나, 학생이 검은색 두 개만 더 골라주면 안 될까?"


'암요. 되고 말고요, 제 전문입니다.'

선호하신다는 0.5mm 굵기의 검정 펜 두 개를 정성껏 골라 드렸다.

"고맙네 학생, 고마워."

할아버지는 세 개의 펜을 포개어 고이 들고 유유히 계산대로 향하셨고, 학생이라 불렸다는 사실에 난 그저 기분 좋을 뿐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떠나고 다른 펜들엔 색 이름이 어떻게 적혀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물론 굳이 색이름을 표기해두지 않아도 투명 케이스 안으로 보이는 펜 심의 색깔에 따라 무슨 색인지 확연히 알 수 있는 펜이 대부분이었지만, 수입이나 한국에서 제조된 몇 개의 펜에도 한글보다는 영문으로 색이름이 표기되어 있는 펜이 더 많았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비교적 한가한 평일 오전이나 오후 교보문고를 들르면 책을 읽고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분들에 꽤 계셨다.

그리고 익숙한 한국 브랜드의 펜만 쓰실 것 같은 이 날 만난 할아버지도 열심히 고르시다 본인 취향에 맞는 일제 중성펜을 사셨다.


백수가 되고 난 뒤로 단순히 주말 쇼핑에서 평일 쇼핑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낯선 경험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좁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고 있었구나 싶기도 했다.

왜냐하면 펜 상단에 적힌 'Black'이라는 글자를 주의 깊게 본 적도 없을뿐더러, 이 펜을 사용하는 고객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단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판매용으로 진열되어 있는 펜을 마구잡이로 집어 들어 정말 테스트를 해봐도 되는 건가? 판매용인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써진 거야? 라며 영문으로 적힌 색이름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볼 수도 있겠다.

나에겐 별 것 아닌 세상이 누군가에겐 어려운 것 투성인 낯설기만 한 세상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이 들고 있는 나 또한 언제는 그런 상황에 부딪힐 수 있겠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만 있는 것 같아 서글퍼졌다.


펜.png 집에 와서 보니 한글로 색이름이 적힌 펜도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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