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창 나들이, 계획하지 않길 잘했다.

-즉흥, 바람보다 더 멋진 현실을 만들어 주다.

by 코알라

나는 아침형 인간이기보다는 저녁형 인간에 가깝고, 계획형 인간이기보다는 즉흥형 인간에 가깝다고 지금껏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큰, 저녁형 즉흥형 인간 말이다.

"오늘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해."

금요일 아침, 오전 근무만 한다는 J의 말에 갑자기 신나기 시작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갑자기 생긴 이 선물 같은 금요일 오후 시간을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을지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집 근처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카페들을 검색하다 대구 근교의 맛집과 카페까지로 범위를 넓혔고, 넓어진 범위만큼 다양해진 선택지들에 점점 신경이 예민해지는 나를 발견했다.

이런 내 모습은 절대 즉흥형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계획을 세우고자 깔짝대긴 하나, 결국엔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 실패를 지레짐작하며 세우던 계획들을 끝내 다 엎어버리는,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찬 '부정적 계획형 인간'임이 틀림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들뜬 마음과는 달리, 끌리는 곳은 죄다 평일이더라도 웨이팅 1시간 정도는 기본이라는 리뷰들 뿐이었다.

-저번엔 대기가 너무 길어 포기했었는데 이번엔 오픈 시간 맞춰서 가서 바로 먹을 수 있었어요.

우리는 오후에나 도착하는데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 걸까...


-목요일 12시쯤 도착해서 1시간 30분 정도 기다렸는데, 기다릴만해요. 감자전 짱!

목요일 12시에 갔는데도 저만큼 기다리는데, 금요일이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겠어...


기다리는 것을 즐기지 못하는 성격인 나는 검색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여유시간이 생겨도 즐길 줄 모르는 나다.

"일단 가보자. 시간은 많으니까 가서 생각해보자."

생각만으로 우울해진 나를 J가 다독였다. 생각만 하다 우울해진 나를 다독이는 건 그의 몫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였고, 지금은 가창의 어느 맛집을 가던 1시간 이상의 대기가 예상되기에 집 근처 자주 가던 국밥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적당히 커피가 땡기는 상태로 가창에 새로 생긴 뷰 맛집이라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서 내가 원하는 뷰의 자리에 앉을 수 있기를 고대하며, 내가 운전이라도 하고 있는 것 마냥 오른쪽 발에 힘을 주었다.

오후 2시 30분쯤 카페에 도착했다.

만차인 카페 주차장을 보자마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안에 사람 많나 봐... 루프탑 좋은 자리는 다 꽉 찼겠네..."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찬 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후다닥 카페 안으로 들어갔고, J는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어랏, 카페 안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음료 주문할 테니, 얼른 가서 루프탑 좋은 자리 맡아줘."

큰 일이라도 난 듯 나 혼자 분주했고, J는 군말 없이 루프탑을 향해 먼저 올라갔다.

음료와 바게트가 든 쟁반을 들고 3층 루프탑으로 바쁘게 올라가며 빠르게 J를 찾았다.

그는 뷰가 한눈에 잘 보이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사람 많아서 걱정했는데, 좋은 자리 맡았네?"

"천천히 와도 됐는데 혼자 총총 거려. 봐, 자리 많잖아."

주위를 둘려보니 뷰가 잘 보이는 자리가 몇 군데 더 비어있었다. 괜히 종종 거리는 나의 영향으로 그의 마음을 쪼이게 만든 건 아닌지 미안해졌다.

이 카페의 시그니처인 아이스크림 커피는 아이스크림의 달콤함과 커피의 쌉싸름이 잘 어우러져 쉴 새 없이 나무 숟가락을 움직이게 했고, 촉촉한 바게트에 발라먹는 수제 크림은 입 안 가득 풍미를 더해줬다.


가보고 싶었던 뷰가 맛집인 가창 룰리커피



"가창은 또 뭐가 유명해? 어디 가고 싶어?"

"여기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아울렛이 있는데 규모가 꽤 커. 10년 전인가 한 번 친구들이랑 와보고 너무 멀어서 안 가봤어."

"그럼 거기 가볼까?"

"그럴까? 오랜만에 한 번 가볼까? 살만한 옷들이 있으려나... 아! 그리고 가창댐 근처 드라이브 많이들 가던데 드라이브도 가자."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그의 배려 섞인 쇼핑 제안에 일부러 관심 없는 척했지만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10년 만에 오게 된 아울렛에 발을 들이는 순간, 키즈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친구들과 놀러 가라며 아이의 등을 떠미는 엄마처럼 지하 1층 남성복 코너로 J를 등 떠밀어 보냈다. 그리곤 뭐라도 하나 반드시 건져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아울렛 안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30분쯤 지나 마음에 드는 바지 하나를 집어 들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본인밖에 없는 지하 1층 남성복 코너에서 J는 이미 입어본 듯한 니트가 걸린 여러 개의 옷걸이를 손에 들고 탈의실에서 나오고 있었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같이 열중하고 있다는 생각에 더 즐거워졌다.


나는 면바지 하나, J는 고급스러운 색의 카디건 하나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고,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노라 후기를 공유하며 차로 향했다.

"내 바지도 완전 잘 샀지만, 너 카디건도 대개 이쁘다. 색이 고급져. 그런 색 찾기 흔치 않은데 마침 사이즈가 딱 하나 남아 있어서 다행이야. 내 덕에 이쁜 옷 잘 골랐지? 너무 잘 어울리더라. 그렇지?"

"1절만 해... 알겠어..."

그는 너무 들떠버린 나를 진정시켰다.


"자, 그럼 이제 가창댐 근처로 가볼까?"

비가 오려는 듯한 어둑어둑한 날씨 덕에 사람 하나 없는 가창댐 둘레길은 스산했다.

쨍한 날보다 비가 올듯한 끄므레한 날씨를 더 좋아하는 우리에게 이 스산함은 산책을 완벽하게 해주는 화룡점정이다.

1시간 정도 걷는 동안, 요즘 J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 팀원의 퇴사로 인한 업무 분담과 신규 채용에 대한 이야기를 격정적으로 나누었다.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언제였던가. 인사팀에서 근무했던 나의 경험들이 그의 생각을 정리하는데에 도움이 되는 듯하여 뿌듯했다.


가창 한섬 아울렛과 가창댐 둘레길


"지금 퇴근 시간이라 차가 엄청 막힐 거 같은데? 1~2시간 정도 더 있다가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가고 싶은 곳 더 없어?"

저녁 6시 30분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지만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우리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드라이브를 하며 생각했다.

"아까 너 가고 싶다던 감자전으로 유명한 그 식당 가볼까?"

"거긴 인기가 너무 많아서 대기가 늘 엄청 길대. 오픈런 아니면 바로 먹기도 힘들다던데?"

"전화 한 번 해봐."

식당에 전화하니 마감시간이 다 되어가니 얼른 오라고 했다. 마감이 1시간도 남지 않았는데 오라는 것인즉슨 대기가 없다는 말이었다.

"가자!!"

"오늘 결국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가네~좋겠네~"

신나 하는 나를 보며 덩달아 웃는 J다.


한 판 내가 다 먹은 감자전. 겉바속촉의 결정판




머릿속으로 계획했던 나의 가창 나들이 일정은 사실 이러했다.

감자전으로 유명한 '정미네'에서 감자전과 돼지불고기를 점심 식사로 맛있게 먹고, 뷰가 좋은 가창 룰리 커피에서 여유 있게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가창댐에서 드라이브와 둘레길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실행하려면 '웨이팅'이라는 큰 산을 넘어야 했고, 우리의 선물 같은 금요일 오후 시간을 마냥 기다리는 것으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해보지도 않고 반은 포기했었다.


하지만 점심 메뉴였던 감자전이 저녁 메뉴로 바뀌었을 뿐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은 모두 했고, 예상치 못한 쇼핑으로 득템까지 하게 되었다.

더욱이 점심 식사였다면 즐기지 못했을 나만의 동동주와 센티하게 만들어 주는 식당 주변의 저녁 운치가 덤으로 주어지기까지.


시간 단위로 일정을 계획하고 출발한 나들이였다면 분명 나는 장소를 옮길 때마다 '거봐, 기다려야 된댔지.' 라며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자칫, 또 그 짜증이 J에게 넘쳐 흘렸을지도 모른다.


일단 가서 정하자는 J의 다독임은 카페 한 곳에서만이라도 뜻대로 즐기고 왔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나의 바람보다 더 멋진 현실을 만들어 주었다.


계획형 인간인 줄 알았던 J가 오히려 즉흥형 인간이었다.



계획은 때로는 무쓸모 하다.

계획은 예상되는 기대치를 맛볼 뿐이다.

의외의 행복감을 만끽하게 해 준 가창 나들이를 되새기며, 앞으로의 '즉흥'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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