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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Sep 12. 2021

한적한, 오후의 그린.

10 Greenery 15-0343

A는 대답을 망설였다. 이제와 생각을 해보니 망설여했던 것도 같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뭔가 모를 침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대답을 위한, 단어 하나하나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듯한 그런 느낌의 침묵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일그러진 공간'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한 나였기 때문에 A는 더욱더 시간을 두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나름의 배려였던 셈이다.


'일그러진 공간' 


참, 애매모호한 단어들의 조합이다. '일그러지다'와 '공간'이 만나 이 세계를 이해하는 단 하나의 개념이 되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더 정확히는 A를 만나서 누군가가 남겨둔 시간을 훔침으로써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내 안으로 받아들였다. 이건 그대로, 내 주변을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관통하는 단어들의 조합이다. 그러니 잘 짜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리적인 설명을 떠나서 공간은 가끔 일그러져있다. 누가 바라보느냐에 따라, 또는 그가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그 일그러짐의 정도는 때때로 이해의 범위를 한참 넘어서기도 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서 일어났던 누군가의 시간을 가지고 올 거야. 물건을 훔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부분이지, 하지만 다르게 보면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어. 시간은 아무래도 그런 거니까. 이해하지?" A는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아니... 아직은 잘 모르겠어."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단어와 문장 그대로의 의미를 말한다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알겠지만 그 안에 놓인 본질은 여전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그럼 그건 차차 알아가도록 하고. 일단 클래식 음악 중에서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거 있어? 자주 듣던 거 있잖아." A가 물었다.


"지금 당장? 잠시만..." 나는 기억을 하려고 했지만 사라진 음표는 더 이상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입으로 부를 수도 아니면 손 짓으로 이를 표현하기도 모두 불가능했다.


"아니, 지금으로써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이거, 완전 다 사라졌구나. 쉽지 않겠어. 근데 너무 걱정하지는 마, 거기에도 다 이유가 있겠지?" A의 따듯한 대답에 묘한 위안을 얻었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그렇다.  


"문제인 걸까? 내가 클래식 음악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그동안 매일 듣던 그 음악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는 조금은 걱정되었다.


"문제는 맞지. 이전에는 아주 명확히 알던걸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니까. 그건 문제야." A는 꽤나 심플하게 대답을 했다. 아까는 걱정을 하지 말라더니, 지금은 문제라고 하고 뭐가 맞는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바로 뒤이어 A가 말을 덧붙였다.


"근데, 다행인 건 그 문제를 너가 만든 게 아니라는 점이야. 이건 세계가 변한 거니까. 너는 여전히 너 그대로야, 그것만 기억해. 어느 한순간, 이 세계가 일그러진 거야. 그리고 그 일그러짐이 너가 가진 음표를 가져간 거고."


A가 말한 전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나는 그대로라는 사실이었다. 아무쪼록 그것만 기억을 하면 되는 일이다.      


말을 하고 난 뒤에, A는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하나 꺼냈다. 목걸이 같기도 하고 작은 조형물 같기도 한데 목에 걸고 다니지 않는 것을 보면 목걸이는 아닌 듯했다. 초승달 모양의 매끄러운 유리 조각품과도 같았다. 그리고 초승달의 끝에 구멍이 뚫려있어 거기에 갈색의 낡은 가죽끈이 걸려있었다.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흔히 공예품 거리에 가면 접하기 쉬운 그런 조각품이었다.


"어때?" A가 대뜸 물었다.


"응? 어떠냐고? 그거 목걸이야?" 나는 흔한 조각품인 것 같다고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목걸이인지 아니면 뭔지 물어보았다.  


"아니, 이건 목걸이는 아니고 그냥 어디 책상이나 식탁 위에 올려두는 그런 장식품이야. 예쁘지?" A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했다. 집안의 가보나 뭐 이런 중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응, 초승달 모양처럼 예쁘게 잘 만들어진 것 같아. 근데 왜 주머니에 넣고 다녀?" 생각해보니 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그렇지? 역시 초승달 모양이지?" A는 재차 확인을 하며 다시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 휘어있잖아." 나는 설마 아닌가? 하고 다시 본 뒤에 대답을 했다.


"그거 알아? 이건 말이지, 원래 휘어져 있지 않았어. 초승달도 그믐달도 아닌 직선의 조각이었다고. 근데 어느 한순간 세계가 일그러진 거야. 너의 음표를 가져간 것처럼, 나에게는 이게 남겨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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