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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Mar 16. 2024

우울 찌꺼기

우울 몸살

I’ll be back.

터미네이터처럼 다시 돌아왔다.

끝나지도 않는 병. 


우울증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병이다. 너무 잘 알고 있다. 학교에서도 배웠고 병원에서도 두 눈으로 직접 보았고 몸소 체득한 것도 있다. 알지만 이렇게 얼마 안 가 다시 돌아올 때는 허무하다. 우울을 막아보려고 몸도 움직이고 공부도 하고 사람도 만났다. 강박적으로 바쁘게 무언가를 했는데도 우울은 귀신이라 빈틈을 알고 들어온다.


우울이 돌아올 때 나는 침대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몸이 매트리스 속으로 푹 꺼진다. 꼭 움푹 파인 땅굴에 떨어진 것 같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기에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침대 밖으로 기어 나온다. 그렇게 우울의 그늘이 지면 일상생활들이 위협받기 시작한다. 설거지를 미루거나 빨랫감이 쌓이거나 바닥에 머리카락이 나뒹군다.


우울은 지나가도 보이지 않는 곳에 찌꺼기를 남긴다. 그 찌꺼기들로 막힌  감정의 통로에는 고름들이 생겨있다. 그 고름들은 지나친 자기 연민이거나 과도한 자기혐오이다. 이번 고름은 자기혐오였다.

(말할 수 없고 앞으로도 말할 생각 없는) 실수 하나에 자기혐오가 시작됐다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나를 다시 우울로 빠뜨렸는데 이번 우울은 고고한 척했다. 마치 내가 성경 속 사마리아 여인이나 된 듯이 착각했다. 아무도 던지지 않은 돌을 스스로에게 한 두 개씩 던지며 맞기 시작했는데 멈출 줄을 몰랐다. 돌팔매질이었다.


아팠다. 우울 몸살이었다.

우울 몸살이 온 첫째 날은 목이 따끔거리고 맑은 콧물이 흘렀다. 단순 감기일 것이라 여겼다. 집 비상상비약통 안에 종합감기약이 있던 게 생각이 났다. 그래서 종합감기약을 먹고 잤는데 나아지지 않았다. 둘째 날 아침 머리가 지끈하고 몸이 무겁고 나른했다. 열감을 느꼈다. 우울 몸살인지는 몰랐지만 종합감기약으로 해결될 단순 감기가 아닌 것은 직감했다. 더 고생하기 전에 집 근처 내과에 가서 진료를 보고 수액을 맞아야겠다 생각했다. 무려 6만 원이나 하는 ‘비급여 수액’을 맞고 쉬니 조금 괜찮아졌다. 그러나 원인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던 터라 ‘비급여 수액’의 효과는 잠시였다. 어쩌면 플라세보(placebo, 위약)였을지도 모르겠다. 셋째 날부터는 코가 막혔다. 맑았던 콧물은 누렇게 변했고 목에 가래가 꼈다. 그리고 나는 인어공주도 아닌데 우울에게 목소리를 뺏겨 말하기 조차 힘들었다.(목이 잠겨서 쉰 목소리 쇳소리가 난다는 소리인데 조금 예쁘게 쓰고 싶었다.) 몰랐다. 그냥 감기가 심하게 왔구나 하고 말았다.


그러나 늘 우울은 지나간 후 남긴 흔적으로 알게 된다. 지난 우울은 우울찌꺼기들을 남겼고 그 찌꺼기들이 감정의 통로를 막았다. 몸살 때문이라고 하기엔 나는 너무 불안정했다. 그때서야 나는 이게 심한 감기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우울임을 알게 되었다. 파도가 아니라 쓰나미로 온 우울은 너무 급하고 너무 높았다. 나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고 동료에게 화를 냈고 환자에게 모진 말을 뱉어냈다.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쓰나미에 휩쓸려 가고 있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히 똑똑하게 우울해져 있어 동료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나는 동료를 붙잡고 떨었다. 나는 그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눈에서 우수수 떨어뜨렸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내 감정인데 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도와달라 빌었다.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동료는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내게 이유를 묻지 않고 손수건과 우울 찌꺼기를 쏟아낼 공간을 주었다.


“힘들었군요. 보듬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마음 추슬러요.”


그렇게 쓰나미를 겪고 자고 일어나도 우울 찌꺼기들은 목에 걸린 가래처럼 끈덕하게 나를 괴롭혔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다정한 사람은 세심하기도 해서 내 몸과 마음에 온 우울 몸살을 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원래 있던 그 우울이야?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가?”


순수하게 다정하게 물어오는 그녀에게 처음엔 교대 근무 스케줄에 인력도 부족해서 하고 싶은 걸 포기하며 타협하고 있는데 좌절감이 들고 스스로가 모자란 것 같아서 괴롭다며 어리광 섞인 투정과 자책을 했다. 하지만 이게 원인이 아님을 그녀는 직감적으로 아는 듯했다. 그녀는 더 이상 물어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순수한 다정함 앞에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이 우울 몸살을 앓게 한 (말할 수 없고 앞으로도 말할 생각 없는) 실수를 털어놓았다.


"괜찮아. 실수잖아.

나한테 요가를 얘기하면서 위로했었지?

나보다 어리지만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어.
늘 네가 나한테 주는 에너지에 감사해.

너도 날 돕잖아? 나도 그럴게.
힘들면 언제든 얘기해.
난 너의 꿈을 응원해.
난 주말에 쉬지만 네가 하고 싶은 게

주말밖에 안 되면 내가 나올게.

그러니까 함께 가자.”


나의 불안정함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울었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에 내 감정의 통로를 가득 꽉 막고 있던 우울 찌꺼기들이 녹아내리고 가득 찬 고름이 아물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 사랑이 약이었다.

스스로를 향한 사랑.

나를 아끼는 사람들의 사랑.

그렇게 받은 사랑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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