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3가 <경일옥>
바빴다, 정말.
우리 일은 항상 그렇다. 파도 같다. 한 번에 쏴아- 몰려오고 한 번에 슈욱- 빠진다.
그리고 남은 건 어지러운 모래알뿐.
모래알을 정리하며 할 일은 그동안 미뤄왔던 너와의 맛남이다.
을지로 3가로 향한다. 설렁탕집 간판을 떼지 않은 채 화덕을 들인 곳—
피제리아를 연상케 하지 않는 외관 때문에 잠시 앞으로-뒤로-두리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찾을 수 있는 곳.
조심스레 문을 열면 낡은 벽과 그곳에 붙은 포스터와 사진들, 달랑 네 개뿐인 테이블과 마주한다.
4인석이 하나뿐이 안 남아서 눈치는 보였지만 그런 걱정은 잠시 접는다.
첫 방문이기도 하고 오래간만에 너를 맛나는 거라 주문은 마르게리따.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반가운 네 모습.
얼마만의 재회인지, 추우욱 녹아버린 치즈처럼 나도 녹아내리며 무장해제다.
첫 한입—와-앙!
토마토소스의 산뜻, 모차렐라의 고소, 바질의 초록 향, 그리고 씹을수록 고개를 빼꼼 내미는 밀의 단맛.
모래알처럼 흩어진 맛들이 입안에서 한데 엮인다.
뒤엔 이태리에서 온 듯한 가족 3명도 와있다. 신뢰가 괜히 올라간다.
그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싶은데 그건 피자 한 입과 함께 꾹꾹 눌러 삼킨다.
사실 오늘 사랑에 빠진 건 너의 모습만이 아니다. 이 공간에도 한눈에 반해버렸다.
사람 냄새나는 이 공간과 벽을 가득 채운 사장님의 기록, 사진 그리고 공지사항 같은 것들.
그중 가장 결정타를 날린 건 메뉴판 첫 페이지에 담겨 있는 사장님의 진심이다.
"제 경험과 삶의 이야기를 담은 소박하고 담백한 핏자를 추구합니다. 제가 이 세상을 떠나면 제 스타일의 핏자도 세상에서 사라지겠죠. 하지만 경일옥은
세상에 남아 세상 사람들을 먹이고 먹고 살아갈 수 있게끔 하려 합니다. 이를 제 소명으로 정하고 오늘도 핏자를 고민하고 고민합니다.
메뉴판 앞 장에 이 정도 포부를 적어두는 사장님이라면
그가 만든 피자는 맛이 없으래야 없을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벽에 붙은 사진, 천장 구멍에 고개 내민 인형, 파마산 치즈는 취급 안 한다는 공지.
하나하나의 오브제들이 이 사장님의 포트폴리오 같이 느껴진다.
이 취향 포트폴리오는 화덕에서 구워지고 녹으며 '핏자'라는 하나의 형태로 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데우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의 삶과 취향을 모아 반죽한 뒤 뜨거운 불 속에 밀어 넣어
나만의 무언가를 노릇하게 구워내고 싶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맛있었으며 좋겠다.
내일이면 또 다른 파도가 내 모래알을 뒤집어엎어 놓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핏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