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늙어 간다는 것

호기심이 있는 한, 청춘은 계속된다

by 느루숨

저녁 세수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서니 문득 숨이 턱 막힌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주한 얼굴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다. 이마의 주름은 깊은 강줄기처럼 뚜렷하고, 눈가에 핀 주름은 세월이 정성껏 빚어놓은 자국처럼 정겹다. 거울 속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한다. '내가 아는 나는 아직 싱그러운 청춘인데, 저 얼굴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잠옷으로 갈아입으려다 바지를 벗는 순간,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예전엔 한 발로도 거뜬히 중심을 잡고 갈아입던 몸이 이제는 이리저리 휘청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낮추다 결국 바닥에 손을 짚는다. 이제 바닥과 친구가 된 느낌이다. 늙어 간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따로 놀기 시작하는 때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지하철을 탈 때면 무심결에 발걸음이 노약자석을 향한다. 마음 한구석에서 "아직은 아니야"라는 소리가 들리지만, 몸은 그 말보다 앞서간다. 괜히 젊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흐려진 눈썹 위에 문신을 새긴 날도 있었다. 거울 앞에서 "이 정도면 괜찮아" 중얼거리며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세월의 걸음에 한 걸음씩 따라가고 있었다.




늙어 간다는 것은 단지 몸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달라지는 과정이다. 늙음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온 낯선 손님이 아니라, 평생 조용히 곁을 지켜온 벗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처럼 말이다. 에릭 에릭슨은 노년기를 '자아 통합과 절망' 사이의 선택이라 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미소 지을지, 후회와 아쉬움으로 고개를 떨굴지 결정하는 시간. 그 선택의 순간이 바로 지금 인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니 다행히도 큰 후회로 점철된 순간이 많지 않음에 감사하게 된다. 늙어 간다는 것은 인생의 열매와 같아서, 충분히 익고 숙성되어야만 그 진정한 맛을 내는 법이다.

사무엘 울먼은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특정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말했다. 무릎이 자주 삐걱대고 허리가 말을 듣지 않더라도, 여전히 꿈을 꾸고 새로운 것에 도전할 호기심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청춘이다. 청춘의 유효기간은 생각보다 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은퇴 후 서예를 시작하면서 나는 두 번째 청춘을 맞이했다. 처음엔 붓을 잡는 손이 어색했지만, 서툰 획 속에서도 진심을 담아 한 글자씩 정성을 들였다. 시간이 흘러 묵향이 깊어질 즈음, 경기 서예대전 한글 부문에서 입상이라는 뜻밖의 결실을 보았다. 조용한 성취였지만,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을 알려주는 소중한 징표였다. 사람들은 늦었다고 생각하면 쉽게 주저하고 멈춘다. 하지만 늦었다고 포기하기엔 인생이 너무 길고 소중하다. 서예를 배우며 알게 되었다. 붓끝이 종이를 만나 펼쳐지는 고요한 세계처럼, 인생 역시 지금부터 새롭게 펼쳐질 수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이제 100세 시대, 인생 2막의 문턱에 선 나는 또 한 번의 꿈을 꾼다. 젊었을 땐 마음속에만 품고 미뤄두었던 나 홀로 가톨릭 성지순례를 이제야 조심스레 준비하고 있다. 비록 낯설지만, 피아노를 배워 삶의 깊은 음률을 표현해 보고 싶고, 인공지능 기술을 익혀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일에도 기꺼이 도전해 볼 생각이다. 늙어 간다는 것은 단지 몸이 늙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만은 여전히 푸르름을 간직하는 일이다. 세상은 아직도 배울 것, 알아갈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늙어 간다는 것은 삶의 속도를 줄이는 일이다. 젊을 땐 숨 가쁘게 달리느라 길가에 핀 꽃조차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천천히 걷는 속도로 주변을 바라볼 수 있다. 소박한 아름다움, 말없이 건네는 풍경의 위로.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나는 이제 결승선만을 바라보며 달리지 않고, 길가의 꽃과 하늘을 누리며 걸어간다. 하루하루가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런 느릿한 걸음 덕분이다.

스펜서 존슨은 『선물』에서 진정한 선물은 '지금, 이 순간'이라고 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이야기이고, 미래는 아직 열리지 않은 신비다. 그렇기에 오직 현재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이다. 늙어 간다는 것은 이 귀한 선물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누릴 줄 아는 지혜를 배워가는 일이다.

늙어 간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이라는 선물을 마음껏 누리는 일이다. 서툴러도 피아노를 치고, 낯설어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화상통화로 손주와 대화하며, AI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일에도 기꺼이 도전한다. 호기심을 잃지 않고 새로운 배움을 받아들이는 이 자세야말로 진짜 청춘의 모습이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배움은 오히려 더 깊고 흥미롭게 다가온다는 걸 나는 이미 경험했다.

늙어간다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이다. 인생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을 활짝 여는 일이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깊이 이해한다. 느린 걸음이 더 큰 풍경을 담아낼 수 있음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천천히 걷는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별빛을 보며 꿈을 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늙어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다. 지혜롭게, 담담하게, 그러나 다시금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아름다운 과정이다.

거울 속 얼굴의 주름은 지나온 시간의 흔적이요, 흔들리는 다리는 견뎌온 세월의 무게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숨기거나 감출 부끄러움이 아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훈장이다. 서예를 통해 깨달았듯, 한 획 한 획이 모여 아름다운 글자가 되듯, 우리의 주름과 흰머리도 깊은 의미를 담은 인생의 글자들이다.

모든 계절에는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 봄의 생동감, 여름의 열정, 가을의 풍요로움, 그리고 겨울의 고요함까지. 늙어간다는 것은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는 지금, 고요함 속에서 발견하는 지혜와 여유라는, 그 어떤 계절에서도 얻을 수 없는 선물을 받는 일이다.




세월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순리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늙음의 지혜가 아닐까. 조급함 대신 여유를, 소유 대신 비움을, 경쟁 대신 조화를 배우는 시간. 늙어 간다는 것은 결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며, 인생의 가장 풍요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일이다.

어쩌면 늙어 간다는 것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맛보는 시간이 아닐까. 성공과 인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거울 속 그 낯선 얼굴에게 미소 짓는다. 그 얼굴이야말로 내가 걸어온 삶의 가장 진실한 풍경이다. 느루숨처럼, 조용히 그러나 끝내 깊은 숨결로 남을 나의 흔적이다.

이 글은 더 이상 청춘이 아니어도 여전히 배우고 꿈꾸는 한 사람이, 노년이라는 계절 속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를 나누기 위해 썼습니다. 늙어 간다는 것은 끝이 아닌, 인생의 또 다른 출발선 위에 서는 일임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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