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돌고 돌아 주체성
제2화에서 니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당신은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기억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삼 단계 중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단계를 간단히 설명했고 그에 관해 각 단계의 위치와 현재 나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나는 짐을 짊어지고 타인이 말하고 원하는 삶을 사는지, 자유를 쟁취하는 것을 기꺼이 하고 있는지, 즐겁고 해맑고 순수하게 놀이처럼 살고 있는지 현재의 나와 비교해보았다. 그러면서 자존감을 높이는데 중요하게 작용하는 "주체성"의 개념을 이야기했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 의지대로 살고 있느냐를 말이다.
내가 선택했다고 믿는 삶, 내가 내 의지대로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은 사실일까?
대학원 수업 때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저서가 있으며 이것을 발췌의 형식으로 중요한 부분을 배웠던 것이 기억에 난다. 특히 오늘 주제와 맞는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죽음에의 선구를 이야기한다. 죽음에의 선구는 지금 우리의 삶에 내가 선택했다고 믿는 삶과 내가 내 의지대로 살고 있는가의 믿음에 확실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먼저 우리가 선택하며 산다고 믿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우리가 삶을 선택했고 또 내 선택과 의지대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다 건강보험을 가지고 있고, 성인이 되면 주민등록을 발급받아야 하며, 대중매체에 나오는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다. 또 남이 가진 저 신발, 옷, 가방, 차 등은 나도 가졌으면 좋겠고, 그럭저럭 무난히 좋은 삶을 선택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나만의 고유한 선택이 아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고유의 선택을 바로 "죽음에의 선구"라고 말한다. 우리는 대체할 교통수단이 있고, 내가 가진 것은 남이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것에서 자기만족과 자존감을 높이려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나쁘지 않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에의 선구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으며 그 누구도 그 고유함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유를 통해서 자신만의 고유한 본래적 자아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남이 가진 신발이나 차는 가질 수 없지만 나만의 고유한 그 무엇인가는 과연 무엇일까?
바로 죽음이다. 죽음 만이 나 자신이 고유하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으라는 이야기 인가? 그것은 아니다. 인간이 누구나 다 가진 이 고유성을 가지고 죽음을 생각하고 그에 다가가는 존재로써, 현재의 삶을 좀 더 주체적으로 살아가라는 이야기이다. 이해가 되는가? 좀 더 단순히 표현하자면 내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죽어야만 하는 것이고 그 경험은 오로지 나 자신만 체험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다. 타인이 어떤 식으로 죽는지 자신이 경험해볼 수 있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내 삶이 내 고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타인이 선택해서 기계적으로 가보는 맛집이 아닌 내가 선택해서 내 혀의 감각을 믿어보는 경험, 걸어서 세계 속으로 에서 본 그 나라의 정취가 아닌 직접 선택해서 가본 내가 느껴본 그 공기의 냄새처럼 독자 여러분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 자존감이 낮은 것도 높은 것도 다 나에게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경험에서 조언과 정보를 얻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가져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맹신하고 눈치 보며, 끌려가는 것은 내가 나로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니까...
우리 다른 사람 눈치 그만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