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동네 의원에서 하얀 약봉투를 받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넷, 셋, 둘, 하나. 심호흡하는 것보다 빠르고 우는 것보단 덜 창피한 방법이었다. 열여덟 살이었던 나에게 정신과 방문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긴가민가하는 엄마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야만 했는데 곧 차라리 혼자 올걸, 하고 후회했다. 엄마는 내 보호자였지만 나의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텅 빈 상자 같은 분위기의 진료실, 그곳에 앉아 무미건조하게 나의 증상을 묻고 메모하는 의사. 묘하게 어긋나는 엄마와 나의 대답에 나는 자꾸 얼굴이 화끈거렸다. 진료는 길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약을 먹은 지 어느새 2년이 넘었다. 물론 지금 앓고 있는 조울증 약만 그렇고 처음 정신과 약을 접한 지는 10년이 넘었다. 고등학생 때 처음 방문했던 병원에서 나는 우울증과 불면증을 진단받았었다. 중증 우울증이었고 의사는 최소 몇 달간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약을 복용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가 약의 부작용을 이야기하며 약에 내성이 생기면 어떡하느냐고, 나으려는 의지보다 약에 의존하게 되면 어떡하느냐고 타박하는 소리에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말에 의사와 의논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약을 끊어버렸다. 처음엔 반발심이었고 곧 엄마의 말이 진짜일까 봐 무서워서였다. 그 뒤로도 몇 년 텀을 두고 두어 번 정도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고 약을 먹었지만 이내 마음대로 약 먹기를 그만두었다.
3개월 정도 기간을 두고 외래진료를 받는 나는 담당 교수님께 종종 약을 언제까지 먹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약 먹기를 그만두는 것보다 줄이는 게 우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오늘쯤 명쾌한 답을 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다.
“약을 끊고 싶어요?”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말하지 말걸. 하지만 지금 나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뿐이기 때문에 꼭 입 밖으로 내뱉고 싶다. 생각해보면 약을 끊고 싶다기보다는 이젠 약을 그만 먹고 싶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약을 삼키는 게 지겨웠고 어쩌다 약 먹기를 깜빡하기라도 하는 날엔 묘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갑자기 기분이 눈에 띄게 나빠지거나 좋아지면 약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긴장부터 됐다. 난 어릴 때부터 약을 잘 삼키지 못했다. 한 번에 잘 삼키지 못해 쉽게 켁켁댔고 여러 개의 약을 삼키다가 하나를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할 때면 약의 느물해진 맛과 촉감을 오랫동안 느껴야만 했다. 나는 일찌감치 친해지고 싶지 않아 선을 그어둔 또래 친구를 대하듯 약을 먹어왔다.
약을 먹으며 얻었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일단 질 좋은 수면을 얻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느슨해진 긴장과 신경을 얻었다. 일정한 감정 기복을 유지할 수 있는 힘과 내가 약을 먹는다는 사실로 인한 가족들과 지인들의 안도감 같은 것을 얻었다. 아쉽지만 약을 통해서 얻은 것은 이 정도뿐이다.
약을 먹고 나면 신기하게도 세상에 관련된 모든 질문이 사라진다. 마냥 멍하고 졸리다. 남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게 된다. 질문을 잃는다는 건 억울한 일이다. ‘왜?’가 전혀 상관없어진 삶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보다 곱절은 노력해서 삶에 재미를 붙여야 하는 사람인데. 역시 이번 생은 망한 건가, 쉽게 생각한다. 질문을 잃으면 당연했던 것들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오늘 본 영화는 왜 좋았는지, 친구의 부탁을 왜 거절하고 싶은지, 하필 왜 이 메뉴를 골랐는지 등등. 질문이 사라지자 나는 나를 모르겠고 남들은 더더욱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약의 부작용으로 안내받지 못한 내용이었다.
처음 미싱을 만났을 때는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36년 차 미싱사다. 나는 아마도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미싱을 돌리는 드르륵 소리나 실이 끊어지는 소리, 가위질 소리 같은 것이 익숙했을지도 모른다. 공업용 미싱 위에 앉아 양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는 어릴 적 사진을 보면 나는 괜히 마음 한 구석을 들킨 것만 같다.
난 스릴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돈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졌다. 치료비로 지금껏 직장생활을 하며 모아두었던 돈은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서른이 넘어서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도 없는 일이고. 나는 열심히 돈 나올 구멍을 찾아다녔다. 새로 직장을 구하려다가도 번번이 면접에서 나의 공백 기간(병동에서 치료받고 재활한 기간)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질문이 사라지고 말을 더듬거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나는 아직 제대로 된 일을 구하는 것보다는 재활이 시급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돈은 필요하고…. 아, 돈이 다 문제다. 도대체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는 평소에도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많고 많은 기술 중에 왜 나에게 미싱을 선택했느냐고 묻는다면 엄마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렇게 답답하면, 차라리 엄마를 따라나서라던 목소리. 나는 중학교 가정 시간에 제법 바느질이나 천 조각을 갖고 무언가를 만드는 걸 재미있게 느꼈던 나를 떠올렸다. 그날 밤, 나는 퇴근한 엄마에게 엄마를 따라다니며 미싱을 배워보겠다고 말했다. 미싱 앞에 앉는 것. 아직 어떨지 모르겠지만, 옆에서 말리는 아빠의 말처럼 무모한 결정일 수도 있다. 내 나이가 나이인지라 자꾸 시작을 미루다간 나중엔 구직하기 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무모하지 않은 건 없지 않은가. 나는 계속되는 물음에도 엄마에게 함께 일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 대화를 기점으로 나의 질문은 ‘약을 언제까지 먹어야 할까요?’에서 ‘미싱을 잘 돌릴 수 있을까요?’로 넘어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