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드디어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무 살 때부터 쉬지 않고 일을 했지만 모아둔 돈은 한 푼도 없다. 정말로 제로다. 돈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라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제로부터 시작하는 재정생활이다.
돈을 아끼고 모으기 위해 가장 먼저 시도해본 건 가계부 쓰기였다. 살면서 '가계부를 써보라'는 조언을 정말 많이 들었다. 내가 과소비 문제로 힘들어하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가계부 쓰기를 권했다. 하지만 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귀찮기도 했거니와, 가계부를 쓴다고 해서 돈을 아끼게 되는 효과가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던 탓이다.
8월부터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가계부 쓰기에 드라마틱한 절약 효과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돈을 어디에 얼만큼 쓰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가계부는 앱으로 쓰고 있다. 요즘에는 편리한 가계부 앱이 정말 많다. 원한다면 은행 앱을 연동해서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도 자동으로 작성이 되게끔 할 수 있지만, 나는 전부 수기로 작성하고 있다. 그래야만 내가 돈을 쓰고 있다는 감각이 더 강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다.
신용불량자가 된 후 아빠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아빠도 오랫동안 신용불량자였기 때문이다. 피는 못 속이는 건지 아빠가 걸어온 길과 내가 걸어온 길이 약간 비슷하다. 아빠는 젊은 시절 알코올 중독, 게임 중독 등 다양한 중독을 겪었다. 나도 이런저런 중독 때문에 힘겨워하며 20대를 보냈다. 20대의 아빠는 카드 돌려막기를 하다가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나도 카드빚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아빠가 본격적으로 직업을 갖고 '제로'부터 출발하게 된 건 서른다섯 살 무렵이었다. 나는 지금 서른 살이니 아빠보다는 5년 일찍 새출발을 하게 된 셈이다.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아빠는 컴퓨터로 가계부를 썼다. 대리운전 기사였던 아빠는 저녁 8시쯤 출근하여 새벽 6시쯤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다. 일을 하고 왔으니 피곤할 텐데도 아빠는 반드시 가계부를 쓰고 난 뒤에야 잠이 들었다. 내 방이 따로 없었기에 아빠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타자를 치며 가계부를 쓰는 소리를 늘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게 왠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아빠의 가계부를 종종 몰래 들여다보기도 했다. 거기에는 아빠가 쓴 짧은 일기도 있었다. 두세 줄 남짓한 그날그날의 일기에는 심각하거나 깊은 이야기는 담겨 있지 않았고, 매일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묘하게 읽는 재미가 있었다.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의 낮 못지않게 치열한 밤을 살아가는 아빠의 삶, 그 속에서 날마다 새롭게 결심하고 다짐하는 아빠의 모습을 엿보는 게 좋았다.
아빠의 가계부 속 일기는 늘 '내일도 힘내자'는 문장으로 끝나곤 했다. 나도 2012년경부터 계속 일기를 써왔는데, 일기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문장은 '내일도 열심히 하자'는 말이다. 이런 것도 유전이 되는 걸까.
돌이켜보면 아빠는 말도 안 되게 낙천적인 사람이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 아빠는 뇌경색으로 쓰러졌고, 한동안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아빠에게는 병원비를 낼 돈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큰병을 앓게 되는 삶의 여러 위기 속에서도 아빠는 늘 방법을 찾아냈고, 끝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게 내가 아빠에게서 가장 존경하는 지점이다.
나도 아빠의 그런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물려받았다. 신용불량자가 되었지만 여기서 내 삶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용불량자가 된 것은 오히려 전환점이고,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물론 그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다.
어쨌든 이제는 나도 아빠처럼 매일 가계부를 쓴다. 나아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내가 커피 값으로만 한 달에 20만 원가량을 쓴다는 걸 가계부를 쓰고 나서야 알았다. 병원비도 생각보다 많이 나가고 있었고, 책값으로는 거의 주거비 만큼의 지출을 하고 있었다. 모두 가계부를 쓰지 않았더라면 평생 모르고 지냈을 사실들이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실질적인 방안을 세워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가계부를 쓰는 건 내 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들을 해나가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부침을 겪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