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게 하는, 나를 웃게 하는, 나를 위로하는 지독한 말들
국문학에는 '웃음으로 눈물 닦기'라는 개념이 있다. 슬픈 상황을 웃음으로 극복하는 한국인의 해학을 일컫는 용어이다. 나는 그걸 정말 잘한다. 눈물 날 정도로.
앞서도 했던 말이지만, 내가 가진 최고의 재능은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어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는 늘 좋은 면을 발견해왔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항상 농담을 했다. 그러면 울지 않을 수 있었다. 한바탕 지독한 농담을 내뱉고 나면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겼다.
오랫동안 아빠를 미워했었다. 내가 신용불량자가 된 것도 다 아빠 때문인 것만 같았다. 아빠는 10년 넘게 신용불량자로 지냈고 얼마 전 파산면책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늘 아빠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랬던 내가 결국에는 아빠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니 우스웠다.
금전 문제는 수 년 전부터 있었지만 이 이야기를 아빠에게 제대로 한 적은 없었다. 이제는 해야 할 때였다. 의외로 아빠는 화내지도 않았고, 흥분하지도 않았고, 왜 그랬냐며 따져 묻지도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왈가왈부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아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아빠는 말했다. 야,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아빠가 사주는 밥을 통해 위로받은 순간이 꽤 많았다. 7년을 동거한 애인에게 1300만 원을 빌려주고 거의 돌려받지 못한 채로 이별했을 때, 그래서 7년 간의 짐을 빼 들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을 때 아빠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거였다. 야, 너 순댓국 먹을 줄 아냐?
나는 원래 국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날 아빠가 사준 순댓국을 먹어보기 전까지는. 특히 나는 분식집에 가더라도 순대는 먹지 않을 정도이니 순댓국은 내가 싫어하는 음식에 가까웠을 텐데, 그날 먹은 순댓국은 왠지 모르게 너무 맛있었다.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하던 내가 순댓국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뱃속이 따뜻하고 든든해지니 모든 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아빠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장어구이집이었다. 웬일로 이렇게 비싼 곳을 데려가나 싶었는데, 아빠는 말했다. 너 앞으로 이런 거 한동안 못 먹을 테니까 많이 먹어라. 둘이서 장어를 세 마리 먹고 장어탕에 밥도 말아 먹었다. 그런데 계산은 나한테 시켰다.
"야, 니가 계산해! 카드론 빌려놓은 돈 있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아니, 아빠. 보통 이럴 땐 아빠가 사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차피 이제 한동안 돈 쓰는 재미도 못 누리고 살 텐데 이럴 때 써야지, 네가 언제 돈을 쓰겠니."
결국 내가 계산했다. 12만 원 정도 나왔다.
장어구이집은 본가에서 좀 거리가 있었다.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만한 거리였다. 올 때는 버스를 타고 왔고, 돌아갈 때는 아빠가 택시를 타자고 했다.
"야, 어차피 기본요금 나온다! 이럴 때 택시 타야지 언제 타겠냐?"
우린 택시를 탔고 또 내가 결제했다.
동네로 돌아온 아빠는 신나게 쇼핑을 즐겼다. 물론 또 내가 계산했다. 20만 원 정도 썼다. 그 후에는 카페에 갔고 커피 값도 내가 계산했다. 아빠는 말했다.
"마음껏 돈 쓰니까 좋지? 이럴 때 써야지 언제 쓰겠냐."
나는 계속 웃고 있었다. 어이없는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었다.
내 빚이 얼마인지 듣더니 아빠는 코웃음을 쳤다. 야, 아빠는 1억 8천이었다. 너 정도 빚은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는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 마신 후 말했다. 은솔아, 4억도 아니고 4000이다. 4000 때문에 나쁜 생각 할 필요 없어. 알았지?
그러더니 아빠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냐고 물어보니 아빠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이렇게 말했다. 신용불량자가 된 걸 축하한다.
남들에게는 이게 정말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를 웃게 하고 살게 하는 것은 이런 지독한 농담들이다. 언젠간 나아질 거라는 알맹이 없는 위로는 듣는 순간 허공에서 흩어져버린다. 만약 아빠가 나를 진지하게 위로하려 했다면 오히려 더 기분이 나빠졌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농담을 한다. 추심 전화를 받는 나를 옆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친구가 괜찮냐고 물어보면, 나는 '오히려 좋아'라고 답한다. 나를 위해 매일매일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오히려 좋아. 친구는 너무 긍정적인 거 아니냐며 웃는다. 그럼 나는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한다. 아, 이래서 인기 많으면 피곤해. 여자들한테서 전화가 계속 와. 내가 참 죄가 많다.
나는 남들이라면 웃지 않을 일로 계속 웃고, 남들이라면 농담의 소재로 삼지 않을 일로 계속 농담을 하면서, 그렇게 견디고 살아갈 것이다. 난 버틸 것이다. 늘 그래왔듯. 괴로움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낼 것이고 농담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