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쉬는 시간이면 종이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 당시에 공주 그리기가 유행이었는데 나와 어떤 아이와 경연을 벌였다. 그 친구는 미술학원을 오래 다녔고, 쉬는 시간이면 그 아이와 내 주변에 친구들이 둘러싸여 있었다.
“와! 나도 그려줘. 둘 중에 누가 더 잘 그리나 보자!”
“우와! 둘 다 너무 잘하는데?”
미술학원에 다녀본 적이 없던 나는 그 순간 친구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눈에 힘을 주면서 더 열심히 그렸다.
집에서 종이와 연필로 맹연습을 하고 와서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다.
틈만 나면 그림을 끄적였고, “잘한다.”라는 말에 신이 나서 더 열심히 그렸다.
그런 나를 닮아서인지 둘째 아이는 그리기에 관심이 많다.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캐릭터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정말 잘해”란 찬사를 들으면 신이 나서 그리곤 한다.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는 데 수학에 흥미가 없는 모습을 보면 어린 시절 내가 떠오른다.
며칠 뒤면 둘째 아이 수학 단원평가다.
수학에 흥미가 없는 탓에 꾸준히 문제집을 풀지 않으니 학교공부가 힘들었다.
시험에도 매번 많이 틀려서 내가 앉혀놓고 시키는데 그때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다른 집안일도 신경 쓰면서 아이 공부까지 봐주려니, 그 시간만 되면 난 신경이 날카로웠다.
“문제 제대로 안 읽지? 정말 이렇게 대충 할 거야?”
할 수 있는 것도 제대로 안 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났다. 화가 차올라 스멀스멀 올라오는 나의 불안과 분노의 감정을 마주할 때면 아이에게 나의 모습을 투영하게 됐다.
“너 벌써 그러면 어쩌려고 그래? 학년 올라가면 더 힘든 거 알아 몰라?”
면박을 주니 주눅 들어서 눈치 보는 아이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린 시절 난 형제가 많은 우리 집이 싫었다. 외동인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고 부모가 아이에게 집중해 주는 모습을 동경할 때가 많았다.
“엄마처럼 아이들 많이 낳고 살지 말아야지. 너무 힘들잖아. 자기 인생 없이 사는 것은 싫거든.”
성인이 되어가면서 나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엄마의 억척스러운 모습이 부담스러웠고, 틀에 갇힌 고루한 잔소리가 답답했다.
어쩌면 그때의 엄마도
“나처럼 살게 하지 말아야지. 고생하는 건 싫으니까.”
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겪어왔던 힘든 경험을 딸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학교 다닐 때 수학을 못 해서 힘들었어. 그러면 얼마나 인생이 피곤한지 아니?”
폭주하는 나의 잔소리에 눈물을 훔치며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며칠 뒤, 아이의 울적한 마음을 위로해 주고자 극장에 가서 “인사이드 아웃 2”를 보고 나왔다.
영화를 보니 며칠 동안 예민했던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우리 아이들이 어떤 사람일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기쁨이 있는 곳에 슬픔이 있는 건 당연한 건데, 나의 아이는 기쁨만 겪길 바라는 마음이 앞섰던 것 아닐까?
어른이 되어가면서 기쁨을 잊어가는 날들도 있겠지만, 네 몫으로 사는 인생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