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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망 Oct 04. 2024

존버의 세계

무엇을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수북이 쌓인 분리수거 상자를 한가득 담았는데 어설프게 닫힌 비닐 너머로 음식물 쓰레기 국물이 흘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풀어진 신발 끈 사이로 밑창에 쓸려 미끄러졌다. 분리수거 상자는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졌고 흥건한 국물까지 쏟아졌다.    

 

진행해오던 외주작업은 아무래도 작가를 바꿔야겠다고 통보해버리고, 새로 만든 기획서는 진척이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비난 섞인 한숨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거냐고 곱씹었다.     


노력 대비 어떤 결과도 내지 못하는 것 같아 현재의 모습에 조급해졌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아니한가. 빛나는 작가가 되어 내가 받은 여러 가지 부당한 대우를 꼭 극복해 내리라고 결심하지만, 현실은 쭈그러진 귤처럼 보잘것없이 느껴져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내 맘같이 되질 않아서 울적해졌다.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는 친구를 만났다. 내가 결혼과 육아로 그림을 오랜 시간 쉬었던 기간에도 공백없이 그녀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본인 작업을 해왔다.     


“최대한 버티기가 답이야. 어차피 창작은 힘들어.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가는 것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아. 외로운 시간을 견디는 게 최대한 버티기의 조건 중 하나야.”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던 나는 창작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유행에 맞게 다양한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보다는 오롯한 나의 글과 그림의 창작물을 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창작의 장벽은 높았다. 작업하면서 일의 진척이 안되었을 때 쉽게 좌절했다. 그때의 나는 기대만큼 일이 안풀리면 안되는 이유 10가지를 굳이 찾으며, 이런것들이 타당한 위안이라고 여겼다. 머릿속이 복잡하면 나에 대한 불신과 자기연민이 더 깊어졌다.   

   

내가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릴 때 누구의 말대로 ‘너무 어려운 길을 선택한 걸까’란 고민이 들었다.


 ‘난 재능이 없나 봐’라는 핑계만큼 비굴해지는 것도 없다. 그런데 재능이라도 핑계를 대야만 지금의 내 마음 밑천이 좀 나아질 것 같다.

‘남들 같은 그림’ ‘남들처럼 잘 쓰는 글’ 그 어디에도 자신이 없다.


어떻게 해야지 이런 답답한 마음을 잘 쓸어 담고 시작할 수 있을까. 재능이 없어도 성실하면 될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던 시절이 있었다.     


‘넌 안될 거야’ ‘그림에 재능이 없는데’ 라는 수없이 많은 얘기를 듣고 버틸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이 되길 바라는 것 보다 현재 나의 상황을 덤덤히 인정하고 그 자리의 상념의 먼지를 털고 다시 걸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질 때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불안의 심연속에 가라앉는다. 오랜시간 그림을 못그렸던 이유도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일거다.


중년의 나이가 된 나는 더 이상 주어진 시간을 헛되게 쓰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 뒤섞여진 마음을 헹구고 싶다. 근처 뒷산을 산책하고 왔더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헬스장에 가서 한 시간 러닝머신으로 땀을 흠뻑 쏟으니 개운한 마음이 든다.


다시 뭐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꺾이는 슬픔에 오래 매몰되고 싶지 않다.


계절이 바뀌는 현재의 공기에 머물고 싶다.

창문을 여니 나뭇잎 소리를 닮은 바람이 불었다.


가을 향이 가득한 푸른빛 하늘에 와락 안기고 싶다.     


이제 다시 작업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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