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의 두 남자가 만났다. 서로의 재미난 일화를 소개하기로 했다. 키 큰 남자 A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며칠 전이었죠. 프리랜서 속에 숨은 백수 생활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목 늘어난 흰색 티와 잠잘 때 입던 반바지에 몸을 넣었습니다. 마무리는 보라카이에서 "완 딸라"를 외치던 아이에게서 산 빨간색 슬리퍼로 했죠. 아 맞다. 얼굴엔 사흘째 기른 수염이 덕지덕지 달려 있었네요. 그렇게 요즘 신문을 도배하고 있는 '롯데'자가 들어간 대형몰에 갔습니다.
그런데 주차장에서부터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차가 엄청 많았어요. 평일 낮에 대형 쇼핑몰을 가득 메운 차들을 보며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터벅터벅 빨간 슬리퍼를 끌었지만 '아, 내가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구나'하고 깨달았어요. 저 빼고 전부 고가의 외제 차였으니까요.
시작부터 한 가지 깨달음을 얻고 쇼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무려 9900원에 불과한 스탠드를 발견했어요. 한창 필요하던 차에 매우 싸다고 느끼며 속으로 '심 봤다'를 외쳤죠. 하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역시 쇼핑은 여자랑 해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마치 마트 주차장에 차가 잔뜩 있어 '실업 문제가 심각하구나'하고 생각했는데 그 차가 전부 외제 차였을 때의 그 허망함처럼 말이죠.
스탠드 포장을 열자마자 안에 전구가 없었습니다. 따로 판다는 문구를 분명 저는 못 봤는데 말이죠. 다시 마트에 목 늘어난 티와 완 딸라 슬리퍼를 신고 갔을 때의 기회비용을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딘가 쑤셔 버린 영수증도 찾아야 했고요.
결국 '심 봤다' 스탠드를 좋다고 사놓고선 5000원 이상의 전구를 추가로 사야 할 위기입니다. 다 더하면 옆에 있던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은 메이커의 스탠드보다 더 비싸지네요. 아, 이거 완전 '롯데'자 이전에 뜨거웠던 단어 '배신'이 떠오릅니다."
키 작은 남자 B가 웃었다. 아이고, 대단히 웃긴 일이네요, 외제 차와 전구에 배신을 당한 셈이네요, 하고 말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전 바로 어제였어요. 지하철 9호선을 한참 타고 가고 있었죠. 그 망할 놈의 지옥철 아시죠? 어쩔 수 없이 그걸 탔지 말이에요. 다행히 저녁 10시가 넘었기 때문에 러시아워 시간은 피했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김포공항행 급행 열차를 탔는데 가양역에서 자리가 나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정말 인간 콩나물 대가리가 따로 없었어요. 여의도는 정말 끔찍했죠. '인권과 지하철'이라는 주제로 똑똑한 분들이 논문 한 번 안 써주나 싶어요. 어쨌든 전 자리가 난 가양역에서 옳다구나 싶어서 얼른 앉았죠. 그렇게 자리에 앉는 순간 어떤 젊은 여자 한 분이 급하게 뛰어나가더라고요. 이어폰 끼고 한창 흥얼대더니 역 도착 소리를 겨우 들었나 봅니다. 그런데 갑자기 "따라락"하는 소리가 났죠. '오잉?'하면서 봤는데 한가운데에 오백원짜리 동전이 떨어진 겁니다. 양쪽으로 두 줄 사람들이 앉아있으면 그 가운데 서 있는 곳 말이에요. 와. 이거 재밌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하나, 주울까 말까, 아니다. 그 전에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 궁금했어요. 서로 흘깃흘깃 쳐다보더라고요. 맞은편에 앉은 20대 초반쯤 돼 보이는 남자 둘은 낄낄 거리고요. 아저씨 한 분은 저처럼 흥미롭다는 듯 눈동자를 굴렸어요. 몇몇은 '이거 뭐냐?'하는 표정이었고요. 또 몇몇은 동전을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제각각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더군요. 그렇게 이 통 큰 오백원은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뭐 그런 애매함 속에서 지하철 가장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갔습니다. 저요? 전 정말 많은 생각을 했죠. 저게 오천원짜리였으면 어땠을까? 아니다. 오만원짜리였다면? 만약 그랬다면 모두가 이렇게 무심했을까 하는 상상을 했죠. 갑자기 지하철 타기 전 자판기에서 본 오백원짜리 커피와 사백원짜리 코코아도 생각났어요. 아마 저 같으면 오천원만 돼도 들고 내렸을 겁니다. 오만원이요? 오만원이라면 바로 손을 집어 "저기요"라고 그 여자를 향해 외쳤을 거예요. 그렇게 찾아 줄 거냐고요? 아니죠. 외치는 척하면서 바로 내려서 출구를 향해 뛰었겠죠. 찾아줄 거라는 거짓말 마세요. 차라리 저처럼 솔직한 게 어설픈 정직보다 당연한 세상입니다. 정식 이꼬르 손해라는 걸 암암리에 가르치는 세상 아닙니까. 아아,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됐냐고요? 김포공항이 마지막 역이었는데 몇몇은 동전을 슥 쳐다보더니 내리더군요. 물론 아무런 신경도 안 쓰고 내리는 분들도 있었어요. 저 그들의 머릿 속에서 오백원에 대한 관념을 끄집어 내 해부해보고 싶었죠. 다시 얘기로 돌아오자면 결국 동전의 주인은 두둥. 바로바로 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안경 쓴 총각이었습니다. 저 다음으로 내리면서 집어 들고는 후다닥 출구를 올라가더군요. 제가 지하철 그 칸 제일 뒤에서 두 번째로 내렸거든요. 그러니까 그 총각이 가장 마지막에 내린 셈이죠. 오백원이 그대로 있었더라면 청소 하시는 아주머니의 소소한 즐거움이 됐을 거라는 점에서의 아쉬움이 떠올랐습니다. 끝내 오백원마저 슬쩍 하는구나 하는 당연함도 확인했죠. 그 총각 지하철에서 내내 페이스북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페이스북이란 그 바다 안에서 오백원이 떠다니고 있을 겁니다. 사진과 함께 뭐라고 썼을지가 가장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