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청바지에 흰 운동화

by 반동희

어젯밤에도 JH를 만났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오른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JH는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했다. 그러면서 왼손으론 내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내밀어 손짓했다.


JH의 흰 운동화는 오늘도 새하얬다. 통화가 끝난 뒤 우린 자주 가던 JH의 아파트 단지 내 구석 놀이터로 갔다. 오늘 하루를 속삭이고 마지막엔 달콤한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는 동안 내 손은 또다시 엉거주춤했다. 나는 JH의 등을 감싸 안았다. JH는 잠깐 입술을 떼며 따뜻하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JH의 목을 감쌌다. 하얀 수증기가 JH 등 뒤로 퍼졌다. 수증기가 내 손의 열기를 휘감아 내몰아 가듯이 내 손은 점점 차가워졌다.


“일어나.”


불현듯 저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깼다. 눈을 뜨니 HJ가 내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베개 옆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토스트 해놨어. 식탁에 2만 원 뒀으니까 담배 한 갑 사고 나머지는 바나나 좀 사다 놔. 오늘은 일찍 퇴근할 거야.”


HJ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나는 눈을 겨우 떠 듣기만 했다. 속으론 JH와 나눴던 키스만 밀려왔다. 입맛을 다셨다. 아직도 달콤했다.


나는 두 달 전 실직했다. 구조조정 덫에서 아무런 연줄도 없는 나는 우선순위였다. 갑작스러운 퇴사는 HJ를 관뒀던 직장으로 내몰았다. 그래도 일 할 수 있는 게 어디냐고 HJ는 내가 실직하던 날 내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날 우린 진하게 사랑을 나눴다. 나는 HJ와 사랑을 나누면서 문득 JH를 생각했다. 몇 년 만에 이상하게 JH가 이미지로 떠올랐다. 그날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JH를 떠올리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HJ의 말은 식어갔다. 실직 상태가 길어질수록 HJ의 온도는 낮아졌다.


나는 JH와 학창 시절 연애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 신입생까지 우린 둘만의 언어로 세상을 봤다. 공부를 곧 잘했던 JH가 재수까지 하며 의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며 우린 붙어있을 때나 떨어져 있을 때나 늘 함께였다고 JH는 훈련소로 가는 날 보며 글썽였다. JH의 어머니는 미래의 사위 평생 할 것이니 잠깐만 다녀오라며 내게 만원을 쥐어줬다.


아버지가 없는 JH는 저음으로 속삭이는 따뜻한 말이 좋다고 내게 늘 말했다. 나는 내가 가장 진실되게 할 수 있는 저음의 단어로 JH에게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복학 후 나는 JH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선 소문이 분분했다. JH가 의사가 되어 외국으로 파견 나갔다는 소리부터 워낙 힘들었던 집안 사정이 심각해져 학업을 포기하고 두문 분출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내가 JH와 사귀던 것을 시기하던 저 먼 남자 동창들은 JH가 얼굴 하나 믿고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가 잘 풀리지 않아 그렇고 그런 바닥을 전전하고 있다고 했다. 확인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답답함은 더해갔다.


평범한 직장에 들어간 나는 HJ를 우연히 만나 결혼했다. 열렬한 그녀의 구애 속에 나는 HJ를 받아들인 뒤 JH를 점점 잊어갔다. 나쁘지 않았다. HJ 정도의 사람이 나를 지지해 주는 게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문득 결혼식을 하루 앞둔 어느 날 JH가 꿈에 나타났다. 그때 JH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검정 구두와 청바지 차림에 흰색 티를 입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JH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웃다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나는 JH를 따라갔다.


그렇게 시작한 꿈에서의 재회는 문득문득 삶의 쉼표마다 계속됐다. 결혼식 날 그랬고 신혼집에 이사한 날 그랬으며 HJ와 우리 둘만의 첫 차를 산 날도 그랬다.


JH는 그때마다 각양각색의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눈에 띈 건 JH가 단 한 번도 신지 않았던 흰 운동화를 신고 있다는 점이었다. 실직 후 JH는 매일 밤 내 꿈에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와 JH는 아득히 옛날을 추억하고 얘기하며 마지막엔 키스했다. 그렇게 나는 매일 흰 운동화를 신은 JH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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