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이렇게 결국 끝에 와서야 네게 진심을 표하는구나. 아비로 떳떳하진 못했지만 부족함 없이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틀렸다고 느끼게 된다. 내 네게 하지 못한 말들이 조각처럼 남아 있구나. 그간 담아뒀던 말들 얘기해볼까 하니 우선 물 좀 한잔 다오.
아들아.
네가 세상에 처음 나타나 응애 소리를 질렀을 때가 생생하구나.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는 상투적인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비록 세상을 가져본 적은 없어도 모든 것이 충만했다. 네가 네 어머니 품에 안겨 울던 날 나는 사람이 가슴으로 우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단다. 그것은 한없이 책임감이 밀려온다는 말론 표현이 안 될 정도로 한 우주를 끌어안는 기분이었다. 인간이란 무한한 존재의 무거움을 그 어떤 철학책에서 읽은 것보다도 네 모습을 보며 선연하게 깨달았다. 새로운 우주가 내 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비로소 완전한 우주가 되었다.
아들아.
하고 싶은 단 한 가지 말이 있다면 실증적인 사람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이 아비는 한평생 글을 써서 먹고살겠다는 신념 하나로 버텼다. 그것은 어느 순간 이것도 쓰고 저것도 쓰며 쌀독을 채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나는 어느 순간 의무감이 번진 손으로 펜을 들었다. 그것은 어떤 때엔 매우 실증적이지 못한 것이어서 아비는 너무 늦어버린 선회의 나침반을 삭이며 밤늦게 종이를 마주한 적도 있단다.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다짐 앞에서 한낱 내 글은 환경미화원의 묵묵한 노동이나 경찰의 땀방울만도 못할 때가 많았다. 글을 쓰겠다는 너는 부디 나의 이 경험을 체득하고 또 체득하여 마뜩잖은 일을 하지 않도록 하거라.
아들아.
돌아보니 남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보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여자를 만나는 것이 온당하더라. 남자란 본디 여자보다 수 읽기에 약하고 지혜를 터득하는 시간이 길어 여자와 관계에서 온갖 갈팡질팡과 주접을 다 떨더구나. 너 보다 배움이 부족하고 아무것도 나은 것이 없는 여자가 너를 좋아하더라도 그것을 일생일대의 축복으로 삼거라. 젊었을 때 경거망동하여 이 마음 저 마음 훑고 다니지 말고 본디 남녀란 비슷비슷한 종점을 향해 걸어가는 것임을 지각하여 눈앞의 안온함에 덕을 다하거라. 그렇다면 네 인생은 풍족해질 것이며 이는 반드시 너와 너의 옆에 있는 여자에게 충만함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아들아.
무릇 세상사 돌아가는 형국은 반복의 연속이니라.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은 일정 부분 맞더구나. 그리하면서도 네가 보아야 하고 추구해야 할 것은 반 발짝의 아름다움과 진일보일 될 것이니라. 반복되는 역사와 세상만사의 불편부당 앞에서도 진일보는 하더구나. 온갖 미사여구가 쏟아지는 시대의 흔들림 앞에서도 늘 중심을 잡고 낮은 곳으로의 시선을 거두지 말거라. 몸을 낮추고 눈높이를 낮추다 보면 보이는 것이 반드시 있느니라. 그러한 것을 내가 좀 전에 말한 실증적인 자세로 대하라. 그리하여 부디 이 땅에 조금이나마 복이 되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거라. 지구의 한구석을 청소하고 있다고 했던 한 환경미화원의 말이 생각나는구나. 너도 이 각오를 가슴에 새기고 무슨 일이든 어떠한 이로움을 추구하는 것인지 판단하여 대하거라.
아들아.
입으로 중언부언하지 말거라. 하나 마나 한 말을 되풀이하지도 말거라. 말은 결국 말을 낳아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는 것이니 너는 불필요한 말을 내뱉어 세상을 어지럽히지 말거라. 필요한 말을 적재적소에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엔 아무런 불편이 없으며 오히려 너와 주변을 이롭게 하느니라.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니라. 내 비록 성공한 문필인 경지에 오르진 못했고 밥을 먹기 위해 쓴 적도 많았지만 중언부언하진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단다. 너 또한 정확하고 선명한 단어를 사용하여 세상에 쓰레기를 만들지 말거라.
아들아.
남과 너를 단연코 비교하지 말거라. 사람의 출발선과 결승선은 모두가 다른 것이더라. 앞을 보고 눈을 똑바로 뜬 채 늘 천천히 걸어가거라. 일찍이 이룬 성공은 공허함을 가져올 것이며 운이 좋아 이룬 성공 역시 결국에 밑바닥을 드러내는 것이 이치더라. 지금과 같이 아비를 따라 글을 쓸 것이거든 매일매일의 실증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그것만으로 배를 채우고 세상을 바꿔보겠단 생각일랑 접거라. 혹여 너의 노력이 내공을 쌓아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일정 시간은 다른 일에 투자하거라. 그것이 결국은 내가 늘어놓은 말들을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니라. 펜이 칼보다 강한 것은 칼이 글을 알아먹을 때이니 우선은 칼을 알기 위해 무던히 칼을 들여다보거라.
아들아.
끝으로 항상 청결하거라. 깔끔하게 씻고 되도록 집을 정돈하거라. 의식은 공간의 지배를 받으며 그러한 의식은 다시 공간을 재구성하느니라. 정돈된 의식에서 나오는 아우라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정갈함이다. 사람과 사람의 접촉은 결국 내재한 의식에서 뻗어 나온 분위기가 지배하느니라. 말로써 모든 것을 하지 않아도 연결되고 절단되는 것은 그러한 것을 받아들이는 오감과 촉에서 비롯되느니라. 의식의 청결을 위해 공간까지 늘 다스리거라.
아들아.
내 할 말은 여기까지다. 못다 한 말이 있는지 떠올려보려 하는데 정신이 희미해지느니라. 아마도 하지 못한 말들은 지금까지 했던 말들보다 중요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더는 중언부언하지 않으련다.
아들아.
마지막으로 면도기를 가져다주거라. 깨끗한 모습으로 떠나련다. 혹시 내가 면도기를 쥐지 못하고 눈을 감거든 마지막으로 네가 직접 내 얼굴을 깨끗이 면도해주길 부탁한다. 내 너를 목욕탕에 데려가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줬을 때처럼 조심스럽고도 끈덕지게 밀착하여 수염을 깎아다오. 나는 이제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