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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Jan 02. 2021

(초단편소설) 해변의 인연

우석이 도착한 양양 해변엔 폐기물이 가득했다. 올여름 태풍이 쓸고 간 자리에 해양 쓰레기가 산적했다고 티브이에서 떠드는 걸 우석은 우연히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석은 지금 당장 바다를 보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불현듯 고속버스에 몸을 실어 한숨 자고 났더니 양양에 도착했고 그 길로 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해변에 발을 디뎠다.


방송 말대로 해변엔 쓰러진 나무, 떠밀려오거나 날아온 플라스틱, 글자를 알 수 없는 광고 전단지, 시커먼 부유물이 우연히 담긴 비닐봉지, 뚜껑 없는 소주병, 찌그러진 맥주 캔 따위가 나뒹굴었다. 여름에 태풍이 휩쓸고 던진 쓰레기가 겨우내 부유하고 있으니 그것은 쉽게 치울 수 없는 쓰레기이거나 지자체에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어느 귀퉁이 따위가 되는 것이었다. 우석은 어둠이 짙게 깔린 해변에 서서 그런 쓰레기들을 보며 자신의 삶도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거나 이미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푸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석의 실패는 벌써 세 번째였다.


스물여섯부터 십오 년 간 몸담은 골판지 공장에선 해고 직전 퇴직금이라도 챙기자는 계산에 제 발로 나왔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푼돈으로 시작한 통닭집은 경쟁에서 밀려 송두리째 넘어갔고 쟁여둔 닭 몇 마리와 의자 따위 집기만 겨우 챙긴 채 정리됐다. 이후 교통비만 겨우 받은 채 두 달 간의 교육을 받고 시작한 보험 영업은 체질에 안 맞았는지 기본급만 챙기기 급급하다가 권고사직 형태로 이 년 만에 손절했다.


그때 챙긴 얼마간의 퇴직금으로 마지막 한 방이라며 빚을 잔뜩 내 노래방을 차렸지만 세상의 타이밍이란 게 참으로 절묘했다. 전례 없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버틸 힘없고 자본 없는 우석은 폐업하기에 이르렀다. 회사를 나온 이후 삼 세 번의 실패였다. 재기라는 것은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원래 높은 곳에 있다가 떨어져 중간은 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걸 우석은 그때 깨달았다.


우석은 파도에 쓸려왔다가 떠밀려 내려가는 담배꽁초를 보며 쓰레기는 결국 쓰레기를 부르고 꽁초 정리도 깨끗한 곳이어야 가능하다고 자조했다. 우석은 담배 생각이 간절해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그대로 불을 붙였다.


우석이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으려는 찰나에 한 남자가 다가왔다.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우석은 남자의 말이 거슬렸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자신만의 시간을 깨는 남자도 별로였고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뭐든 날카롭게 반응하기 때문이고 우석이 지금 딱 그 짝이었다. 실패의 연속 끝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부터 아예 저 바다에 몸을 담가버려 육신을 없애야 하는지 고민하던 찰나에 다짜고짜 죄송하다거나 실례하겠다는 말도 없이 남자가 불 좀 빌릴 수 있느냐고 물어온 것이었다.


게다가 남자의 행색은 어딘지 모르게 잔뜩 멋을 낸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머리는 번들거리게 무스를 발라 넘겨 윤기가 흘렀다. 우석이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지금 이 순간 우석에겐 남자의 차림이 은행이나 금융권 직원처럼 보였다.


우석이 마지막으로 한 달 만 더 노래방을 버티기 위해 은행을 찾았을 때 창구 직원은 더는 대출을 해줄 사유가 없다고 사무적으로 말했다. 우석은 지금의 이 상황과 감정과 그것을 깨트린 남자의 말과 심지어 남자의 직설적인 화법과 말투까지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급작스레 끼어드는 차가 자신의 차보다 비싸 보이면 괜히 더 화가 나는 법이다. 우석은 비싼 녀석을 끼워줄까 말까 고민도 하지 못하고 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우석은 내키는 대로 아무 말 없이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라이터를 건넸다. 우석은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멍하니 바다를 보며 그저 라이터를 내줬다. 그런데 남자 역시 우석에게 라이터를 받아서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그대로 말없이 라이터를 돌려줬다. 우석은 한숨인지 담배 연기인지 그것이 섞인 것인지 모를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쉬면서 주머니에 라이터를 넣었다. “후”하는 소리가 우석 자신의 귀에도 크게 들렸다. 우석은 돌아서서 가는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형씨.”


“네? 저요?”


“그래요. 사람이 라이터를 빌려줬으면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우석의 분노가 튀고 있었다. 남자는 몇 초간 대꾸하지 않았다.


“실례한다는 말도 없이 라이터 좀 달라고 하고선 그냥 내빼요?”


우석이 채근 강도를 높였다.


“라이터가 필요해서 좀 빌린 거고 고이 써서 줬더니 뭐요? 지금 시비 거나 이 사람이.”


의외였다. 저쪽도 인상을 팍 쓰면서 달려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어이 형씨. 말이 짧네.”


여기서 더 물러서자니 우석은 창피했다. 우석이 보기에 남자는 뻔뻔하고 염치없는 비싼 차가 분명했다.


“더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으니 조용히 찌그러집시다. 피차 별 볼 일 없는 것 같으니.”


우석의 재차 공격에 남자도 물러서지 않았지만 찌그러지자는 단어로 배배 꼬아 버렸다.


실상은 저 남자도 엊그제 막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막막한 마음에 바다를 찾은 것이었다. 남자는 우석보다 다섯 살이 많았는데 은행에 직원 감축 바람이 불면서 제 발로 퇴직금을 챙겨 나온 꼴이었다. 우석이 마지막으로 은행을 찾아 대출 상담을 했을 때 이 남자는 바로 그 은행에서 마지막 업무를 보고 있었다.


막막한 남자들은 자신들을 스친 옷깃 인연을 당연히 알 리 없었다. 그저 엉뚱한 해변에서 쓰레기 더미를 보고 감정이 격해져 이제 막 일촉즉발로 부딪히는 찰나였다. 저 멀리서 맥주캔이 떠밀려와서 그들 발뒤꿈치에 안착했다.


우석은 라이터를 바닷가로 집어던졌다. 남자는 잠시 놀란 눈치였지만 헛기침을 하곤 시선을 저 멀리 돌렸다.


우석은 밀려온 맥주캔도 파도로 차 버렸다. 발을 까딱거리며 캔이 파도에 휩쓸리는 걸 응시했다. 그때까지도 남자가 아무 말이 없자 우석은 이 싸움에서 이겼다고 자체 판정 내렸다. 남자가 멀뚱히 서 있는 걸 보면서 우석은 뒤를 돌아 쿵쾅 소리라도 나는 것처럼 꺼지는 해변 모래를 밟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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