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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두부 Aug 01. 2022

당당한 걸음

종이에 과슈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한 남자에 대한 것이다. 365일 내내 초록 모자에 초록 양복을 입고 다니는 남자가 있었다. 모두들 그를 초록 양복의 노숙자라고 불렀지만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당당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길거리를 걸어 다녔다. 어린아이들은 그와 마주치면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리며 '개구리 똥 냄새!'라고 말하고는 도망갔고 노인들은 그를 보며 혀를 차거나 고개를 저었다. 한 번은 그의 모자를 보며 '그 모자는 자네의 조상들이 써왔던 겐가?' 라며 비꼬는 늙은 노인도 있었다. 그런 무례한 질문에도 그는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무엇이고 집은 있는 건지 왜 저렇게 떠돌아다니고 있는지 역시 누구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남자가 다니는 마을에 시력을 갑작스레 잃게 되는 전염병이 생겨났다. 마을 사람들은 잔뜩 겁을 먹고 집 밖을 나오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하는 상황이면 두꺼운 천에 두 개의 작은 구멍만 뚫어 최소한의 시야만 확보된 채로 천을 두르고 나오곤 했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유모를 전염병은 사그라들지 않고 추운 한겨울까지 이어졌다. 밖에서 잠을 자는 이 남자도 전염병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는 집도 눈을 두를 천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전염병이 들끓는 이 겨울이 자신이 부자로써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사는 마을에는 전염병으로 시력을 아예 잃어버린 한 아이와 노인이 있었는데 그 둘은 가족이었다. 아이의 유일한 혈육인 할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렸고 아이 또한 따라서 걸린 것이었다. 작은 모퉁이에서 뜨거운 감자 빵을 팔아 아이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인에게는 눈을 고칠 방법도 돈도 없었다. 초록 양복의 이 남자는 자신의 눈을 할아버지와 아이에게 주기로 결심했다. 그는 한파가 유독 심했던 지난해 떨고 있는 자신에게 감자 빵을 내어주던 아이와 노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손은 차갑고 까칠했지만 미소는 그 누구보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는 마을의 가장 큰 병원에 찾아가 노인과 아이에게 눈을 주겠다는 서명을 하고 눈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노인과 아이는 앞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겨울의 끝 무렵 잃었던 다른 한쪽 눈의 시력도 조금씩 되찾아 갔다. 전염병으로 시력이 떨어졌던 사람들도 조금씩 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해의 세월이 흐르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아이는 성인이 되었고 할아버지는 그 해 여름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할아버지가 만드시던 감자 빵으로 큰 공장을 세웠고 점점 규모가 커져 큰 사업가가 되었다. 돈과 사랑하는 가족을 가졌지만 그는 자신과 할아버지에게 눈을 주었던 사람을 항상 생각했다. 어느 추운 12월의 일요일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그의 눈에 빛이 바랜 초록 모자를 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겨우겨우 걸어 다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어디선가 본 노인의 모습을 더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자신이 어릴 적에 감자 빵을 내어주었던 초록 양복의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단숨에 그에게 다가가 지팡이를 잡은 그의 앙상한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날이 추우니 저희 집에서 따뜻한 빵과 수프를 드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지팡이를 움직여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노인의 두 눈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는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과 할아버지에게 눈을 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의 작은 몸을 덮어준 후 다시 한번 자신의 집에서 식사를 할 것을 권했다. 노인은 잠시 동안 머뭇거리다 그와 그의 가족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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