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패들훈련
장마가 막바지를 향해 달리는 시점이다. 오늘도 꽤 날이 흐렸고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전 날 밤 미친듯이 일을 끝내고 개운한 마음으로 양양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내일 입을 수트와 갈아입을 옷까지 모두 개어서 준비해놓고는 얼른 이부자리를 펴서 잠에 든다. 주말 여름에 차트가 좋은 날이면 정말로 사람이 많아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타려면 새벽 댓바람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해가 뜨기 전부터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미리 모든 것을 준비해 놓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다음 날 새벽 네 시 반, 부리나케 일어나서 수트를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밖은 캄캄한데 새가 짹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렴풋이 습기를 머금은 풀의 냄새를 느끼며 숨을 후웁 들이쉰다. 냄새가 좋다. 숨을 들이쉬고는 물치로 향했다. 아직 잠이 덜 깼지만 서핑하면서 배가 고프지 않으려면 먹는 게 좋으니까 햄버거를 우물우물 먹는다. 가는 길에 해가 뜨기 시작한다. 어둠속에서 점점 밝아지는 분홍빛 하늘은 언제나 경이롭다.
새벽에 벅벅 왁스를 바르는 소리가 좋다. 차도 지나가지 않는 고요한 가운데 왁스 긁는 소리만 드륵드륵 들린다. 내 몸을 깨우는 소리이기도 하다. 쪼그려앉아 왁스를 바르며 저 앞의 설악산을 한 번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쉰다. 선스틱까지 바르고 입수! 일등이다! 바닷속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입수한 지 얼마 지나지 사람들이 입수하기 시작했고 곧 바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물치는 실제 차트보다 작게들어오는 편이라 파도가 크게 들어오는 날만 가고는 하는데, 오늘은 차트가 적당히 컸지만 망설이다가 물치로 입수했다. 다른 곳은 어떨 지 감이 잘 안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타다보니 예상보다 사람들이 적었다. 그말인 즉슨 다른 스팟들도 파도가 잘 들어온다는 얘기다. 물치는 죽도나 동산 등 메인스팟에 파도가 별로일 때만 사람들이 꽉 차는 스팟이다. 중심스팟에서 거리가 꽤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엿들어보니 오늘은 특히 갯마을이 잘 들어온다고 한다.
파도도 좋고 같이 타는 사람들도 모두 좋았다. 잘 타는 사람들이 파도를 독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늘 같이 타는 사람들은 젠틀하게 타는 사람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복병은 라인업 앞의 개미지옥. 물치는 바로 앞에 설악산이 있는 아름다운 스팟이다. 다만 그 말은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물치바다로 내려온다는 말도 된다. 전날 비가 꽤나 많이 온 탓에 맑은 물이 꽤나 거센 물살로 내려왔고 맞은 편 쓸려오는 파도와 맞닿아 강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이를 모르고 앞까지 라이딩을 했었는데 두어 번 개미지옥에서 허우적대고 나니 깨달았다. 저 곳은 가지 말아야 할 곳임을. 나처럼 휘적거리는 사람은 그냥 물 밖으로 나가서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나을 정도로 물살이 셌다. 곧이어 저 옆에서 누군가 손가락이 부러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리시에 새끼손가락이 휙 감겨 부러져서 급히 병원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앞의 개미지옥에서 말린 것 같았다. 비교적 초보인 나도 위험대상이므로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만 라이딩을 하다가 개미지옥이 다가온다 싶으면 바로 풀아웃을 했다.
안그래도 라인업이 길지 않은 물치인데, 10:30 만조가 다가올수록 점점 더 라인업이 앞으로 당겨져서 어느 새 개미지옥을 피하려면 약 3초 라이딩하고 끝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후 어쩔 수 없지, 그냥 나가기로 했다. 마지막 나름 재미있는 라이딩을 하고 끝끝내 개미지옥에 한 번 더 빠진 후 나왔다. 이 개미지옥이 있는 부근은 실제로 물을 먹어봐도 짜지 않아서 평소에는 서핑이 끝난 후 둥둥 떠서 보드와 수트를 씻을 수 있는 고마운 물이지만 오늘만큼은 지긋지긋한 곳이었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시이원한 아이스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는 낮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ㅠ) 동호해변의 포장마차에서 맛있는 고등어구이를 먹고는 푸욱 쉰다. 역시 서핑 끝나고 쉬는 것이 진짜 휴식같다.
저녁이 가까워져서 어디서 탈까 캠을 보지만 이럴수가, 어디든 마땅치않다. 그나마 동산이 좋아보였지만 마땅치 않았다. 한참 고민하다가 바람이 한창 터져있는 동호해변으로 들어갔다. 동호같은 오픈비치는 바람이 터지면 조류가 정말 장난 아니다. 이 날도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조류가 있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패들을 쉬면 바로 라인업에서 빠져버리는, 그런 사악한 조류였다. 파도 자체는 적당히 크기가 크고 힘이 좋아보였지만 라인업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정말 끊임 없는 패들링이 필요했다. 계속 패들링을 하다보면 막상 파도가 왔을 때는 힘이 다 빠져 파도를 탈 수 없는, 그런 파도였다.
극한의 패들을 하며 어쩌다가 파도를 하나 탔는데, 어라 너무 재미있다! 파도 아무거나 하나 타면 그냥 나가겠다고 욕을 하며 타고 있었지만 물뽕을 맞아 다시 들어왔다. 라인업으로 돌아갈 때도 조류를 거슬러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 보드를 들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현명했다. 다시 라인업에 도착하기는 억겁의 시간이 걸린 것만 같다. 다시 지친 이번에는 정말 하나만 더 타고 나가리라 다짐한다. 어두컴컴해 질 즈음 재미있는 파도를 하나 더 타고 장렬하게 퇴그은!
두 개 밖에 못 탔지만 열 개 같은 두 개였다. 시즌방에 돌아와서 두 개를 탔다고 하니 두 개나 탔어? 하며 잘 했다고 해 주어서 더 기분이 좋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쉽지 않은 파도였던 것이 분명하다. 씻고 개운한 마음으로 백숙을 먹고 잠에 들었다. 내일은 더 파도가 좋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네 시 반, 아직 어둠 속에서 덜 마른 수트를 찾아 꾸역꾸역 입고 또 물치로 향한다. 물치에 도착해서 날이 서서히 밝았는데 이럴수가, 파도가 없다. 이럴수가. 물치는 원래 작게 들어오니까, 하며 크게 들어오는 동호로 향했다. 그런데 이럴수가,, 동호도 없다. 선크림도 다 발랐는데,, 이럴수가,,,
이럴 때 필요한 건 빠른 판단이다. 차트로 보아 파도는 곧 올라올 것이지만, 요즘같은 휴가철엔 사람들이 일어날 시간이 되면 바로 차가 막히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 아니면 밤 늦게 갈 수 있다. 잠깐의 고민 끝에 선크림을 지우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한다. 서울에 도착해서 정말 뻗었다. 잠시 일어나서 밥을 먹고 다시 잠에 들었다. 하루 종일 잤다. 극한의 패들훈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제 장마도 끝나고 태풍파도만을 기다려야 하는 때이기에 마지막까지 쥐어짜서 놀길 잘했다. 전 날 동호에서 하루만 더 탈 걸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탈 수 있는 만큼 탔기에 후회는 없다. 이번 주도 잘 놀았습니다!
7/23 토요일 물치, 동호에서